계 20:7-10 미혹하는 사단

바울서신을 보면 신앙생활에 대해서 싸움과 투쟁으로 묘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에베소서 6:11절에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대적해야 할 존재가 있음에 대해서 밝히고 있고, 빌립보서 1:28절에서도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고 말씀하면서 신자를 대적하는 존재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5:8절에서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신자를 대적하는 존재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의 서신을 읽어보면 신앙 생활은 신자를 대적하는 존재인 마귀와의 싸움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신자를 대적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전서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귀가 찾아다니는 삼킬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사단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삼키기 위해서 찾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결국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은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된 자이고, 그들은 곧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피로서 값주고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죄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한사람이라도 더 멸망을 받게 하기 위해서겠습니까? 우린 마귀가 신자를 미혹하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해서 멸망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즉 신자를 지옥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에게 미혹된 결과는 멸망입니다. 하지만 마귀의 활동 자체가 단순히 신자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가 무엇 때문에 신자를 대적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를 위해서 아들을 보내시기고 피흘리게 하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백성을 멸망시킨다는 차원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신자의 행함이란 신자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 안에서 행하시는 결과로 나타난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1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는 말씀대로 의의 열매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이지 신자들의 자질이나 노력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서 열매가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왜 의의 열매가 있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고, 신자로 하여금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의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택함 받아 쓰여지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약 신자가 마귀의 미혹에 빠진다면 그것은 신자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 자체가 손상이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란 자기 구원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마귀의 미혹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셨는지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물론 그 앎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성경에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해서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니만큼 이 말씀을 이해하는 신자라면 행함이란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일하신 결과이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심과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해도, 어떤 열매가 보여져도 그것을 자신의 영광이나 공로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마귀가 대적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으로 하여금 가로채도록 하는 것일 것입니다. 즉 보여지는 열매에 대해서 자신의 공로로 여기게 한다거나 자신이 모든 영광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미혹입니다. 물론 마귀의 미혹을 이것 하나만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귀의 미혹은 신자를 대적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훼방하기 위한 목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 성경에서 신자를 대적하는 존재가 있으며 신자는 필연코 대적자와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면 이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직 사단이란 존재를 남겨 두시는 것입니까?' 분명히 하나님에게는 사단을 멸할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단의 존재를 남겨 두시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장차 사단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의 9-10절의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단의 활동은 잠시 허락되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어찌할 수 없어서 방치하시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단의 활동 허락은 사단의 정체를 확실하게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울 때 그곳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사단의 활동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 짐승이며 무엇이 거짓선지자인지의 여부인 것입니다. 계 13:14절에 보면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이적을 행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미혹하는 짐승입니다. 이 미혹에 빠진 자들은 짐승을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힘을 경배하고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의 활동으로 인해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가 누구인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단의 활동이 허락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고 말합니다. 천 년이 차매 사단이 옥에서 놓여 나왔다는 말은 사단이 천 년이란 기간동안 무저갱이란 옥에 갇혀 있다가 잠시 놓여났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수요일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천 년을 우리가 이해하는 시간 개념으로 해석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 개념에 매여서 일하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해와 달의 규칙적인 운동으로 인해서 변화되는 자연 현상을 논리적으로 구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간이 간다는 것은 인간이 만든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변화를 인간이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시간이란 인간의 의식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 년이 차매'라는 말 역시 우리가 이해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천 년이란 인간이 극복할 수 없었던 수명이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천 년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천 년이란 인간의 수명을 극복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을 극복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죽음이 없는 상태로 말할 수 있고, 죽음이 없는 상태란 곧 영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천 년은 죽음이 없는 영원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천 년이란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신자가 인간의 수명에 매이지 않는 천 년의 상태를 살아가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것이 천 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천년 왕국이란 천년이란 기간동안 계속되는 왕국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천년도 아닙니다. 천년 왕국이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음을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천년 왕국을 살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 하는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이 곧 천년 왕국에서 왕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일입니다. 이 하늘의 일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 년을 영생의 차원에서 생각할 때 천 년 동안 사단이 결박을 당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단에 대해서 완전히 승리하신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의 승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서 사단은 전혀 꼼짝할 수 없는 결박당한 상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단이 천 년이 차매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인다고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로 인해서 생명의 길이 완성된 상태에서 사탄의 활동이 허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허락된 것이지 사탄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잠시 허락하신 것은 사단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드러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단이 활동할수록 하나님으로 인해서 맺어진 의의 열매가 아닌 것이 어떤 것인지가 증거되지 않겠습니까?

욥기서를 보면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욥을 칩니다. 그 이유는 욥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욥에게 준 것이 있으니까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사단의 사고방식은 아무런 받은 것도 없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사단에게 욥을 치는 활동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욥을 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욥에게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책임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자기 백성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단이 결박당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활동을 해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사단의 권세가 이미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잠시 놓여난 사단은 그 활동으로 인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사단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사고방식으로 살았던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계획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자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대한 열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열심이 사단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거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마귀의 시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생존의 문제와 세상 영광과 권세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삶의 목표로 여기고 있는 것들을 예수님에게 제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줄 테니까 나에게 경배하라는 것이 사단의 제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내세우시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라는 것을 통해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것으로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고 세상이 주는 영광과 권세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진 하늘의 영광과 권세에 더욱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것을 더욱 많이 소유함으로서 얻어지는 승리보다는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승리에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승리를 기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의 승리에서 떠나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잠시 놓여난 사단이 활동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사도들의 서신에서도 마귀의 대적이 있음을 언급하며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고 굳게 서라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귀의 대적은 신자 한 사람의 멸망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 자체를 방해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의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불의한 죄인에게서 의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그리스도의 능력이 신자에게서 맺어지는 의의 열매로 인해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 의의 열매를 방해하고자 하는 것이 사단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의 열매는 무엇으로 방해되는 것입니까? 우선 의의 열매란 성령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열매로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해서 맺어진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맺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양심이나 윤리로서는 도저히 맺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자가 성령에게 순종되어질 때 보여지는 것이 의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은 신자가 성령에게 순종되고 있음을 증거 하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성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매인다면 맺어지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흔적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자신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의 모습이 보일 때 성령에게 순종치 못하고 있는 결과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자각을 하게 되고 결국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 신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성령으로 새생명을 얻은 자에게서만 증거 되는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의 행함까지도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인가를 잘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 대한 사단의 미혹은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서 뭔가 답답함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에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맥이 빠지게 합니다. 신자의 할 일은 그리스도가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에 있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될만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활동입니다.

사단의 활동이 어떤 것인지는 신자가 십자가의 자리에서 살아갈 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신자를 희생과 섬김으로 인도해 갑니다. 그러나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을 받으려고 할 때 그것이 곧 사단의 활동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용서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아닌 원수갚음으로 드러날 때 그 역시 사탄의 활동 결과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신자로 하여금 하늘의 생명을 얻었음에 감사하고 살아가게 하는데, 육신의 생명을 더욱 사랑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역시 사단이 활동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미혹 아래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지켜지고 있다면,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살고자하는 소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감사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빌 1:6절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이루신다는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신자된 여러분의 확신으로 자리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무엇에도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이 승리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소망이 되고 인내가 되고 기다림이 되고 두려움 없이 굳게 선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