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0:11-15 흰 보좌의 심판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경을 구원론적 입장에서 대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구원을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구원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목적으로 한 성경이 되어 버리면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 대해서 인간 구원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대하는 인간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에 대해서는 구원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한 자의 표준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서는 구원에 대한 결정적 역할이 인간 편에 주어지게 됩니다. 즉 인간이 잘하면 구원에 참여하고 못하면 참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경에서 구원을 위한 방법론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계속될 것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오류입니다. 성경에서 부분적으로 구원에 기준이 될만한 인물들의 행위를 발췌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다'라고 가르치거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가르쳐서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서 구원에 참여되는 것처럼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성경 전체가 거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로마서 9:13절에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이미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결정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선택과 버림이 결정되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라면 이 원칙 앞에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라는 물음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구원할 자와 버릴 자라는 의미로 이해해본다면 이미 인간이 어떤 행위와 방법을 구하기도 전에 이미 구원과 버림이 결정된 상태라면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대한다면 결국 구원을 목적한 성경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에베소서 1:4절의 말씀을 보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고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있기도 전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선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이 계획되어진 것입니다. 과연 이것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선택으로 봐야 합니까? 단지 인간 구원이라는 것을 목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이라는 것을 계획하셨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제가 생각할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사탄이 인간을 미혹할 때 하나님이 나서서 막았어야 했고, 사단의 미혹을 이기는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애당초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성경이 구원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은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의 열매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구원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이 계획되고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 성경이라면 우린 성경에서 많은 모순을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단 창세 전에 택하셨다는 것이나,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결정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해석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원칙을 앞세워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 즉 착한 행동이나 교회에서의 행위, 십일조 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이나 성경 보는 행위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행위로 높여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이 구원의 문제나 복의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니 우리는 선택을 지키고 선택받은 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을 우리 스스로 지킨다는 말이 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택했지만 우리들의 자질에 의해서 선택에 변동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 되버립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문에서도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 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서 섭니다. 이미 죽은 자들까지도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13절의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는 말씀을 보면 바다와 음부라고 하는 깊은 곳에 있는 자들까지도 심판대 앞에서는 것은 피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심판을 받습니까? 심판이라는 것은 판결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의 판결 기준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는 말씀을 보면 행위가 심판의 기준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삶들이 하나님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고, 나중에 심판대에 서게 되면 그 행위가 근거가 되어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세상에 있을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야하고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하면서 신앙 생활에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되버리면 창세전에 예정하였다는 말이나 태중에 있을 때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정했다는 말씀들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될 것은 15절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 말씀을 보면 불못에 던지우는 자, 즉 심판에 의해서 멸망에 들어갈 자는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는 것은 분명 우리들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기록되어지는 것이 생명책입니다.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결국 심판의 기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느냐 기록되지 못했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있다고 말합니다. 그 다른 책은 생명책입니다. 그리고 15절의 말씀대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책이 아닌 다른 책, 즉 행위가 기록된 책은 어떤 역할을 합니다. 본문을 보면 행위가 기록된 책은 구원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고 다만 그 행위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울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는 오직 멸망의 근거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높이는 행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는 그 행위까지도 심판의 근거로서 자신을 멸망으로 밀어 넣고 있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5: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행위에 대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과 본문을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했으니만큼 인간이 행위와 구원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행위를 따라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으니만큼 분명 선한 일을 행해야 생명의 부활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선한 일과 악한 일에 대한 분명한 구분부터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과 윤리 차원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행위가 윤리와 도덕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굳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해도 윤리적인 착한 일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도 내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구원의 근거를 제시하는 결과가 되버릴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로 나올 수 있는 선한 행위라면, 분명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행위란 윤리 도덕과는 상관이 없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행위, 즉 착한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0:38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착한 일을 행하셨는데 그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주심으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즉 착한 일이란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행위는 인간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보여지는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6절에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는 말씀을 함으로서 착한 일이란 인간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착한 일을 시작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택한 자에게만 시작하실 뿐입니다. 택한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께서 택한 자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악한 행위만 보여질 뿐이고 그 결과는 심판의 부활일 뿐입니다. 이것이 죽은 자들이 모두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그 행위가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즉 책에 기록된 행위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았던 삶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를 따라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은 그 누구도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단호히 하는 말씀입니다. 그 근거로서 택한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이 함께 펴져 있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운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행위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행위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에서 행위를 완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가 전혀 요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셨고 섬기라고 하셨고 희생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도 한목소리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행위가 전혀 구원의 근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까? 구원의 근거가 생명책에 있으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의문이 난다면 그것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구원에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을 왜 하라고 하느냐는 의문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행함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창세전에 택하시고, 생명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셔야 하는지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구원의 입장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서의 선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었을 때 도구로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진 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 자체가 이미 구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된 자는 구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선택입니다. 창세 전에 선택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그 이유를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입장에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늘에서는 사단과의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패한 사단이 땅으로 쫓긴 상태에서 하나님은 사단을 멸하시기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계획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즉 신자는 여호와 전쟁의 군사로 선택을 입었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라' '서로 용납하라' '희생하라' '섬기라'는 등등의 말씀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말씀들도 인간의 윤리적인 행위로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가 사단과의 싸움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나 용납하는 것이나 희생이나 섬김은 사단의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군사로 산다는 것은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라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세상은 힘이 제일입니다.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려고 애를 쓰는 나라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이고, 인간이 행함이 자랑되고 그 행함에 의해서 인간이 높여지는 세상입니다. 행하게 하시는 분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공로가 인간에게 돌아갑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정신으로 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자기 힘이라는 것이 없고 스스로 이루는 것이 없습니다. 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정신에서 사랑이 보여지고 희생이 보여지고 섬김이 보여지게 됩니다. 이것이 사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행함이란 주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도구입니다. 믿음을 말로만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빌립보서 1:27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합니다. 복음과 삶이 하나되어야 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삶에서 보여지는 믿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단과의 싸움에 군사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싸움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하나님이 그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결과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며 살아가는 행위가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행위에 대해서 주님의 능력이며 주님이 내 안에서 행하신 결과라고 고백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원래 자기의 본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삶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불못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마지막입니다.

첫째 사망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고 생명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죽음이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둘째 사망, 영원한 불못입니다. 이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 속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서 새생명을 얻게 된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사로 부르신 택함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신 것도 군사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최고의 복임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여러분의 삶으로 증거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