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1-8 새 하늘과 새 땅

교회가 하는 캠페인 가운데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신자의 삶의 목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저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을 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거늘 지금 세상은 과연 변화된 흔적이 보이는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세상 현실이 과연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달라진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이래 교회로서의 책임을 전혀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말로는 세상을 변화시키자고 외치면서 말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면 말에 대한 책임을 졌지만 세상이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까?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이 그순간은 듣는 사람들에게 뭔가 사명감을 주는 것 같고, 가슴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은 감동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감동이 과연 얼마나 지속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인 성도를 부르셔서 남겨놓으신 이유가 과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인지부터 면밀히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드렸지만 세상이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면 노아 때에 홍수로서 세상 전체를 심판해 버린 것은 하나님의 성급한 판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세상을 왜 기다려주지 않고, 그리고 당시 의인으로 불리던 노아를 통해서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심판이라는 방법만을 드러내신 것입니까? 그리고 이제 와서 신자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제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세상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곧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는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를 윤리와 도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서로 돕고 사랑하고 사회적인 범죄가 줄어드는, 즉 소위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 에덴동산과 같은 상태의 사회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는 역사로서 증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이 소위 아름다운 사회를 꿈꾸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꿈꾸는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껏 그러한 사회를 이루었다고 말한 국가를 전혀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각 개인이 그 일을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종교인들은 종교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이 엉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세상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를 전혀 모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단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는 교회조차도 세상의 배후에 누가 있으며 세상의 누구의 권세 아래 붙들려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사단의 권세 아래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도덕과 윤리로서 본을 보이고 덕을 세우면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사단의 권세가 인간의 도덕과 윤리에 의해서 패배될 만큼 나약한 것입니까? 그정도로 나약한 사단이라면 우리를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로 값주고 자기 백성을 사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해방은 우리들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인해서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이 신자라면 신자에게는 분명 어떠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 변화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4: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리스도의 말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이 오심은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행 1:8)

결국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변화란 세상 자체가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상 속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 사실을 노아 홍수의 심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는 두 종류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다에 잠겨 버린 멸망의 세상과, 멸망에서 살아남은 방주 안의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 방주 안의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만이 멸망과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홍해 사건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홍해에는 두 종류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애굽입니다. 그중 이스라엘은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애굽 군대는 죽었습니다. 사망의 세상과 사망과 상관이 없는 세상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사망과 상관이 없는 세상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가 주어진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세상 속에 또 하나의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세상은 곧 성령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영으로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를 기뻐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말합니다.

1절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본문 1절에서 언급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개 새 하늘 새 땅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때 기존의 세상은 없애 버리고 대신 새로운 세상, 즉 천국을 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단지 장차 올 천국으로만 이해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런 의미로 말하고 있을까요?

새 하늘 새 땅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새로운 세상을 뜻합니다. 하늘과 땅이 세상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기존의 세상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기존 세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대신 세우는 교체의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4,5절을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고 하는데 처음 것이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처음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처음 세상의 상태를 눈물이 있고, 사망이 있고, 애통이 있고,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있는 세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 것이 지나간 새로운 세상에는 눈물이 없고 사망과 애통함과 곡하는 것 아픈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세상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1절에서 말씀한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다가 있지 않은 새로운 나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해서 장차 올 천국은 바다가 없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물고기가 없다라는 식으로 천국이 어떻다는 것에 대해서 지레짐작하는 것은 크게 실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 천국이 어떻게 생겼고 천국에는 뭐가 있고 등등의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란 사망을 의미합니다. 노아 홍수가 사망을 뜻하고 있고, 홍해 역시 사망을 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바다란 사망을 의미하며 사망 속에 처한 세상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상에 바다가 없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은 사망이 없고 심판이 없는 나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을 처음 세상과의 교체의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처음 세상이 아직 존재하는 지금은 새로운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기존의 세상이 사라지고 도래할 천국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천국은 어떤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적인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가를 묻자 대답하시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이 말씀은 천국은 공간적인 것도 장소적인 것도 어떤 규모적인 것도 그 무엇도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곧 새로운 마음이 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이란 성령이 함께한 마음임을 생각해 볼 때 결국 성령 받은 자의 마음이 곧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새롭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후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새로운 피조물을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었다고 할 때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아닙니까? 성령이 함께 한다면 그는 심령이 새로워진 사람이고 그렇다면 그는 분명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에베소서 4:23-24절에서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는 대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새사람의 상태가 기존의 것을 없애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새 사람된 신자에게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가 보이고 있음을 볼 때 새 사람이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없애고 새 것으로 교체한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심령, 즉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에 그에게는 사망이 없는 것이고, 이것을 본문에서는 바다도 사라지고 보이지 않더라는 말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고린도후서 5:17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세상은 그리스도 안을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이란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안에서는 사망도 눈물도 애통함도 곡하는 것도 아픔도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살아가는 기존 세상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힘이 제일이며 힘을 소유하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힘없는 자들의 눈물이 끊이지 않고 애통함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사망과 아픔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며 이미 하늘에 앉은 자로 살아갑니다(엡 7:6).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은 성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65:17-18절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는, 즉 처음 세상의 것은 기억되지도 생각나지도 않는 세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세상 마지막에 도래할 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즉 이사야 선지자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새로운 세상입니다. 오신 메시야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메시야의 권세 아래 복종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이고, 오늘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안의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우리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기존 세상의 삶의 방식을 소망하지 않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성령이 함께 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사망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된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안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신자는 새로운 세상을 사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과연 신자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뜻이겠습니까?

에베소서 2:1-7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자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이루셔야 할 그리스도의 일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20:21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이유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고, 그리스도안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자로서 세상에서 수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신자가 세상에 보냄 받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해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세상을 사는 신자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임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만 찬양하고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시면서 새로운 피조물된 우리가 세상에서 수고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