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1-8 새 예루살렘

지난 시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새로운 세계는 장차 올 천국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도래한 세계로 이해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는 기존 세계의 질서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세계에 맞는 새로운 질서가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나라의 백성은 새로운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질서에 대해서 아무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정부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데모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농민들 역시 고속도로를 막고 데모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이유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추구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원하지 않는 불이익이 있을 때는 집단적으로 힘을 모아서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존 세계의 질서입니다. 즉 기존 세계의 질서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선이고 불이익은 악으로 여깁니다. 이것을 최선의 질서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의 질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 질서의 본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면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새로운 질서인 희생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새로운 삶의 질서로 삼고 그 질서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란 이 세상인 아닌 또 다른 공간적인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질서는 사단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기존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롤 말하면서도 결국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갈등하고 미워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사단의 질서에 순종하고 있는 새로운 세상이 아닌 교회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는 갈등이 없고 미움이 없고 경쟁이 없습니다. 사랑과 희생과 섬김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가겠습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되어진 사람들입니다. 새롭게 되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의 질서를 소망하게 되고 자신에게서 옛 질서의 모습이 보여질 때 자신에 대해 애통해 하며 회개하면서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새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질서로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이 그 존재를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 세상이 사라질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왜 이 세상이 사라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의 세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상은 과연 어떤 상태의 세상이겠습니까? 이것을 2절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5절에 보면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을 합니다. 즉 새롭게 되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과 수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의미하는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즉 거룩은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인간에 의해서 거룩의 모습이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 역시 예루살렘 자체가 거룩하게 되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계 11: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옛날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함께 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라고 하는 물체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함께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보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제물의 피로 인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제물의 피가 흘려진 언약궤에 있었던 것이지 언약궤를 떠난 함께 하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계 21:22절에 보면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말했던 11:19절의 말과 다르게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19절에서 요한은 분명 하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성전에 언약궤가 있음을 봤습니다. 그런데 21:22절에서는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이란 새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즉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은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에 구약과 같은 건물로서의 성전은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 양이 함께 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과 함께 하십니다. 어린 양은 희생의 제물입니다. 즉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피흘리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룩은 바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함께 하기 때문에 함께 거룩한 자여 여겨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그리스도가 함께 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으로 여김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것은 구약과 같은 어떤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예루살렘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되어진 신자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살아가는 것이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새 하늘과 새 땅에 또 다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내려온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본문은 그러한 뜻으로 오해되어질 위험이 많습니다. 1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고, 2절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내려온 것을 말하기 때문에 마치 거룩한 성이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내려온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거룩한 새로운 세계 안에 또 다시 거룩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거룩한 성 안과 밖으로 또 다시 거룩이 구분되는 모순이 있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새로운 세계 안에 내려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자체가 거룩한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같은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함께 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루살렘이라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결국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자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뜻하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기존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로운 질서로 삼고 그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신자들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기존의 교회, 즉 사람들이 모여서 이름 붙인 교회 자체를 거룩한 모임이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사람의 손으로 세운 성전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들만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며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된 거룩한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항상 위로부터 발생되어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재주나 노력으로 발생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거룩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예루살렘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황폐하게 될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은 결국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성령으로 인해서 새롭게 되어진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치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지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교회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교회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란 다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몸답게 존재하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셨다면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다움이 증거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다움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새로운 나라를 다스리는 새로운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의 존재 의미는 성전에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 자체로는 그 어떤 의미도 없고 성전이 예루살렘에 함께 했을 때 예루살렘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역시 성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다는 것으로 성전이 성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약궤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언약궤가 있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심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삶을 인도함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라는 땅 자체가 평화를 주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함께 함으로서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의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어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가 날뛰게 되고 그때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웃사는 여호와의 진노를 받고 죽게 됩니다. 이것을 본 다윗은 언약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십니다. 이것을 전해들은 다윗은 다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되고, 옮기면서 너무 기쁜 다윗은 춤을 추게 됩니다. 이것을 본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조롱하게 되고 미갈은 그로 인해서 자식이 없게 되는 징계를 받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면서 춤을 추며 기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의 함께 하심이 얼마나 크나큰 복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가 왜 언약궤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을 가로막은 것이 인간의 죄 때문이고, 그 죄에 대한 해결이 언약궤에 뿌려지는 피로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희생의 피 안에 함께 하시는 것이고, 인간 역시 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언약궤가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피 흘리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것이고 죄인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것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알았기에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많이 강조했으며 그 자신 역시 그리스도안에 거한다는 것을 무한한 은혜와 사랑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자기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죄인된 인간에게는 기쁨이며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이미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하심이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입니다. 그것으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로운 나라는 복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기존 나라와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의 나라에 거하고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또 다른 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만을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거할 곳은 세상이 아닙니다. 성도가 영원히 거할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새로운 질서에 순종하면서 그것으로 기뻐하고 살아가는 새 예루살렘이 성도가 거할 새로운 나라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백성이 되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으로서의 혜택만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 세상에 몸담고 있으면서 새로운 나라의 질서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삶이 다스려지며 말씀이 원하는 쪽으로 나아가기를 기뻐하십니까? 만약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전혀 보지 못하고 산다면, 이미 이 세상에 시작된 새 예루살렘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살고 있습니까?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그 나라가 내가 영원히 거할 본향임을 아시고 주님만 바라보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심의 영광됨과 은혜를 안다면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은 우리에게 무한한 감사와 기쁨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만 바라보는 삶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