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1-8 하나님의 장막

3절에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말이 '임마누엘'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할 때 어떤 생각을 가지십니까?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다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내가 실제로 느끼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가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여러분의 환경과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실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해서 시큰둥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마치 우리들의 삶에 어떤 도움과 혜택을 주기 위함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증거 되는 여러 모습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오히려 철저하게 인간의 허물과 잘못됨이 드러나고 증거 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승리 역시 단지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고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승리의 힘은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옛날 조선시대에 양반 집의 종이 왕과 함께 하면서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사건으로 보시면 됩니다. 종이 어떻게 감히 왕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겠습니까? 만약 종이 스스로 왕에게 나아갔다면 그 종은 왕에 대한 불경죄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종은 절대로 왕에게 나아갈 수 없고 왕의 얼굴조차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입장인 것입니다. 서로 신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종이 왕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면 그 가능성은 왕이 종을 불러주었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왕이 불러주었다는 것 자체가 왕이 종에게 함께 해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종의 입장에서는 왕의 부름을 입었고 왕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거룩일 수밖에 없습니다. 왕이 종에게 다만 집을 주고 돈을 준 것보다 불러주고 함께 해준 것이 더 영광된 것이고 종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성은이 하해와 같은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영광된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서면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그는 이미 영광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은혜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 때문에 내 삶에 혜택이 주어진 것은 없다는 불평을 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관계인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소멸할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히 12:29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말합니다. 신 4:24절에서도 역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로서 여호와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멸 당해야 할 존재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그는 이미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이미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된 우리에게 주어진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생명을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시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세상이 결국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할 때 심판을 이기는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인간은 부정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인간의 부정함이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본래의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의 가치는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죄로 인해서 인간이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었으며 그 결과 사망에 처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인간의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그 죽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생명에 대해서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는 자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그 죄를 극복하고 주어지는 것이 생명이며, 죄에 대한 극복은 인간의 의지나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신 분의 행함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분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이며 이 믿음으로 사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으로 부르셨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백성 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죄인이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죄에 대한 해결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신 것입니까?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라고 말합니다. 3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게 되고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에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장막에 인간의 죄가 극복되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한 은혜입니다. 사랑이며 자비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어떠함을 외치는 것이 하나님의 장막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안에는 인간의 죄를 말해주는 증거물들이 들어 있습니다.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 모세가 하나님에게 받은 돌판이 그것입니다. 그 언약궤 위에 제사 때마다 뿌려지는 것은 제물의 피입니다. 희생 제물의 피가 뿌려짐으로 인해서 인간의 죄가 용서를 받는 것이고, 죄를 용서받음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망에 처한 인간이 생명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희생 제물의 피로 인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죄를 대신한 희생제물의 피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것이 오늘날 희생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게 되고, 그런 인해서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며 생명을 누리는 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귀한 것이며 세상의 전부를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피를 귀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세상 그 무엇을 줘도 바꿀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가 좇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정작 그리스도를 말하는 우리들에게서 무시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서 죄인된 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사망이 아닌 생명에 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가 있고 피가 있는 장막의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처럼, 오늘 우리는 희생의 피가 있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정성이나 행동을 보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성이나 행동이 죄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믿음을 찾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믿음을 보시고 자기 백성으로 확인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자랑하지 마시고 오직 세상에 오셔서 피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되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십시오. 그리스도만 높이십시오. 그것이 신자로서 가장 합당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에스겔서에서는 새로운 성전으로 등장합니다. 겔 48:35절에 보면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성전의 이름이 '여호와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여호와 삼마가 에스겔서의 결론으로 마쳐지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스겔서 10:18절에 보면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난 것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43:4-5절의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는 말씀을 보면 떠난 영광이 다시 돌아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떠나신 여호와가 다시 돌아옴을 뜻하는 것인데, 이것은 새로운 성전으로 인해서 되어진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돌아온 것은 새로운 성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3:6-7절을 보면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성전에 거하시면서 다시는 내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호와삼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삼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이 누구와 영원히 거하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성전은 신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신부가 신랑과 혼인잔치를 하고 영원히 신랑과 함께 거하는 것이 곧 여호와삼마이며 이것을 미리 말하고 있는 것이 에스겔서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여호와삼마'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영원히 함께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신랑과 함께 하는 그 나라는 4절에서 말씀하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는 상태의 나라입니다. 신랑과 영원히 함께 하는 그 날이 바로 신랑으로 인해서 흘려진 모든 눈물과 고통과 애통함이 씻겨지는 날입니다. 이 날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랑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만나서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 곧 평강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없이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곧 사망과 심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나라에 영원히 거하는 날까지 우리의 할 일은 신랑을 기다리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지만 사망이 없는 생명을 누린다는 기쁨은 하늘나라에서도 계속되어질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세상에서 미리 맛보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