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9-27 어린양의 아내

신앙생활은 억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억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되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인해서 자연적으로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간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깨닫게 함으로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왜 돈을 사랑하면 안되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돈을 사랑하면 안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의 삶은 돈을 목표로 하는 삶에서 벗어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을 돈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방향을 하나님에게 두고 살아가는 인간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이 수정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알게 하셔서 십자가를 사랑하는 삶으로 만드는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런 느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삶 역시 기쁨이라고 하는데, 왜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기쁨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전 13장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분명 사랑에 비해서 믿음이나 소망은 뒤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의 비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믿음과 소망에 의해서 맺어지는 열매라는 의미로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는 믿음이나 소망은 참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많이 말하면서 그 사랑이 맺어지는 믿음과 소망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깁니다. 특히 소망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 약속되어 있는 것은 장차 주어질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름 받은 자에게 약속되어진 소망이 신자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고, 이기게 하고, 사랑하도록 만드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4-5절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소망이 확고하기에 믿음과 사랑이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늘에 준비된 분깃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살아도 이 소망을 간직하고 사고 죽어도 이 소망 가운데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는 죽음 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곧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지금 우리들의 믿음이 이런 소망이 없는 믿음이라면 우린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소망이 없이 산다는 것은, 장차 누릴 그리스도안에서의 영광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누릴 영광된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신자가 현재의 것에 대해서 마음이 멀어질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신자가 어떤 자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얼마나 영광스런 존재인가를 말하고 장차 어떤 영광에 들어갈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주겠다고 한 것은 어린 양의 아내입니다. 어린 양의 아내란 단지 '누구의 아내다'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 양을 위해서 있는 아내란 의미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고, 신랑만을 의지하고, 신랑을 기다림으로서 신부다움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만약 신부가 신랑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독립하여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신부다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으로 기뻐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10절부터의 말씀입니다.

10절에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라고 말씀합니다. 9절에서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있고, 10절에서 천사가 보여준 것이 새 예루살렘 성임을 볼 때 새 예루살렘 성은 성으로 표현된 어린 양의 아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11-21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새 예루살렘이 온갖 보석으로 장식이 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보석으로 장식된 예루살렘 성은 어린 양의 아내의 가치와 영광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천국의 모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분명 어린 양의 아내의 모습이지 천국의 모습이 아닙니다. 때문에 본문의 새 예루살렘과 보석으로 장식된 모습을 두고 장차 신자가 거할 천국이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12문이 있는데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성의 성곽에는 열 두 기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가 등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12사도가 기초석이고 그 위에 세움을 입은 것이 구약의 12지파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약이 구약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약은 신약 위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아내란 신약의 사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인 예루살렘은 실제의 성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기초석이 12사도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볼 때 12사도가 증거 했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복음 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의 실체인 것입니다.

15-17절을 보면 천사가 성을 척량하는 것이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합니다. 천사의 척량이라는 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건축되어진 성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하는 것은 에스겔서 40장에 나오는 에스겔이 어떤 사람이 성을 척량하는 것을 본 환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사람이 성을 척량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이 곧 천사였음을 말하는 것이 본문에서의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의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린 양의 아내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그들이 이미 확정되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며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린 양의 아내란 인간의 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며 부름 받음입니다. 때문에 어린 양의 신부가 되었다는 것은 존귀하고 영광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이 온통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부의 존귀함과 영광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영광스런 존재로 만드십니다. 신랑이 영광스러운데 만약 신부가 영광스럽지 못하다면 신랑의 영광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부는 신랑의 영광에 참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신자가 바라보고 살아가는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 단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어린 양이 함께 하는 그것이 곧 교회이며 그 교회가 곧 어린 양의 아내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으로도 교회 되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물을 짓고 교인과 목사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린다고 해도 그것으로 교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 함께 하시는 그것이 곧 교회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교회의 교회다움, 즉 신부의 신부다움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새 예루살렘 성에는 쓸모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와 달의 비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해와 달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의 등 아래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아내의 아내다움은 신랑이 오실 때까지 신랑을 기다리며 신랑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기존의 세상 아래 살고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는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신자의 소망이기 때문에 그 소망으로 힘있게 살아갑니다.

내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부입니다. 신랑의 은혜와 희생을 자랑하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어린 양의 신부로서 스스로를 잘 단장하면서 신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영광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워진 것이 신부입니다. 과연 나는 말씀 위에서 살아가는지 돌아보면서 나 자신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훼방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어린 양의 신부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