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2:1-5 생명수의 강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돈'에 의해서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힘있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할 것 다하면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돈 없는 사람들은 온갖 낙심과 절망 속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 역시 세상 사람들처럼 돈에 의해서 삶의 모습들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는 것은 장차 천국에 가서 영생을 누린다는 의미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간다면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란 그 속에 새로운 생명이 흐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삶 역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2절을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다시 보여주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흐르고 있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에스겔 47:1절에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에도 역시 물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도 보면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원래 물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세상 만물은 물을 중심으로 존재합니다. 물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본문 2절에서도 그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길 가운데로 생명수 강이 흐르는데 강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 두 가지 과실을 맺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보면 생명수 강으로 인해서 큰 풍성함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본 이 환상은 우리에게 생명수로 인해서 풍성함을 얻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신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 드린 대로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어린 양의 신부가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의 생명의 근원은 바로 생명수의 강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에 흐르는 생명수 때문에 어린 양의 신부된 예루살렘은 다달이 과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어린 양의 신부에게 있어서 참생명이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수 강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삶에 대해서 소망을 가져본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말하면서도 항상 돈에 대해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치 돈이 생명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한탄해 하면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1절에 보면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수의 근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라는 것입니다. 생명수의 강의 물이 생명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강 좌우에 다달이 열 두 가지 과실을 맺는다는 것도 생명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의 결과를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21:22절에서 언급한 대로 성전은 곧 하나님과 어린 양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란 다만 죽어서 천국 가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리스도, 즉 생명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속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4: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합니다. 그때 여인은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는 대답을 합니다.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주겠다고 한 물과 여인이 기대한 물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생각하는 물은 사람의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는 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하시니까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을 대했던 여인의 수준이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인의 관심은 오직 갈증을 해결하는 물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체를 목마르지 않는 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목을 축이는 물이 우물에 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덕분에 한번 먹으면 목마르지 않는, 즉 다시는 우물에 물을 기르러 올 필요가 없는 편리한 물을 기대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에 의해서 내 목을 축일 물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찾는 것도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목을 축일 물을 얻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즉 그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에게 남편의 이야기를 꺼내시고 결국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과 대화한 그분이 그리스도이며 그분이 자신에게 생수가 되시는 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생명수는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라는 것을 표현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목을 축이는 물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영원한 생수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인생의 전부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알았고 그분을 우리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물동이를 버린 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물동이를 붙들고 그 통에 내 목을 축일 물을 담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 없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피흘리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는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세상에 있습니다. 내 세상 것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실체는 죄인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인간의 실체를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안다면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 것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겠습니까? 신자라면 자신을 죄에서 건져내시고 하늘백성 되게 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목말라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돈이 생명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돈에 대해서 목말라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돈을 요구합니다. 돈이 힘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생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돈없이는 살아가도 그리스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소원인 것입니다. 생명이 그리스도임을 알기 때문에 나타나게 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곧 생명에 거하는 신자가 영원토록 거할 나라의 실체입니다. 이 나라가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본향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이지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일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돈도 내 수중에 있을 때는 영원히 내것같이 여겨지지만 결국 다 내 손을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힘으로 여기고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나를 살리는 것이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하시고야 말 멸망의 자리에서 무엇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그리고 참생명을 소원하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여러분의 그 소원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세상 것에 대해서 목말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신자는 이미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은 자입니다. 그 속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명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것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 것은 지나가는 것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고 모든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생명수가 흐르는 어린 양의 아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