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2:8-15 일한 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출애굽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서 죽음을 모면하고 애굽에서 나오게 된 그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되었으며 이제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기뻐하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삶은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자로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져야 할 삶입니다. 이것을 인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우리들 스스로 억제하고 참는다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세상에 되어질 하나님의 모든 일을 아는 자로서 인내하게 되어진다는 의미의 말인 것입니다. 즉 참는 것이 아니라 참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마지막 때 무엇이 귀하며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증거될 것인가를 알기에 인내하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란 지금 한 순간의 좋아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장차 우리의 영원을 책임질 참된 생명된 것을 팽개칠 어리석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어려움과 고난을 참을 수밖에 없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끝까지 기다려지고 인내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주님이 오시기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언제 오시느냐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 오시든 주님은 우리에게서 믿음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흔적을 증거 삼아서 자기 백성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혼인잔치를 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입니다. 결코 헛된 소리가 아닙니다. 날마다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돌아봐야 할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일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보신다는 것이지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보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무엇을 하나님의 일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 6:28-29절에 보면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지시만 하면 능히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함으로서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믿으려고 합니다.

믿음이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이나 능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믿을 자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도 우리가 행한 일을 따져서 잘한 것과 못한 것을 구분해서 상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 자들에게 그리스도에게 있는 상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상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믿음으로 살았다면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게 되고 영원토록 그리스도로 더불어 기뻐하는 복된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것임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믿음이 주어지고 그들만이 믿음으로 살게 되고 상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대로'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선택되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멸망으로 마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출석하고 봉사했다는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자랑하고 내어 놓을만한 것이 전혀 못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11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11절)고 말씀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은 생명책이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기에 의를 행하고 거룩을 행하도록 권유하고 설득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끝까지 불의를 행하다가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일한 대로 갚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사람의 일을 하며 살았기에 결국 사람의 일의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는 것은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그대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말려도 안됩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말려도 믿음 없이 불의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믿음이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에 되어질 일을 알기에 어떤 어려움과 힘듦과 고난에서도 그대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인내 역시 믿음의 산물이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신자의 덕목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에 되어질 일을 안다면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아는 자로 그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말하고, 마지막 때 세상의 어떠함을 안다고 하면서 세상에 소망을 가진다면 아는 자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아는 것과 삶이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참된 앎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앎이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지식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음이 있으시면 그대로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믿음으로 그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 하고 주님에 대해서 죄송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실로 믿음 있는 자의 정직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애통한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곧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것, 회개하는 것, 이것이 진심으로 믿음이 있는 자의 모습이며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정직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자신을 깨끗케 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행위로도 그 무엇으로도 안되는 것이 우리 자신을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써만 깨끗케 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들이 복이 있는 자들이고, 이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게 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되어질 하나님의 일인데 이 일을 알게 된 우리는 과연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15절에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성 밖에 있는 자들은 그대로 더러움을 행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개라는 것은 빌립보서에 보면 거짓된 가르침을 하는 자들을 일컬어서 하는 말임을 볼 때 거짓된 교훈을 전하고 따라가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거짓된 교훈을 하고, 우상을 섬기고, 무당이나 점치는 술객의 일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 지옥간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행위들을 안하면 천국 간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이고 더러운 것입니다. 결국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성밖에 있는 자들이고, 성밖에 있기 때문에 그대로 더러움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에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자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보다 더 큰복은 없습니다. 이 복을 알기 때문에 신자는 믿음이 주어진 자로서 그대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에서도 믿음으로 그리스도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 백성이 붙들고 있으며 그 사랑은 그 무엇에도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3절의 말씀대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마치실 것입니다. 시작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처럼 마침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질 것입니다. 반드시 되어질 일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언제든 되어질 일이라면 신자로서 마땅한 삶은 날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세상이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가 기쁨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세상에 마음이 끌린다면,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애통해 하면서 주님에게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진실로 믿음이 있다는 흔적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있기에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믿음이 있기에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애통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빛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빛이며 세상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힘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삶 역시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보여지는 것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고로부터 보여지는 열매들입니다. 시기와 미움과 다툼으로부터 사랑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믿음의 능력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귀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앎이 참된 것이라면 그 증거는 아는 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일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산다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깊은 감사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에 거한 자로 남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