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2:16-21 오시옵소서

누가복음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예수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많은 소출을 바라보면서 든든한 마음을 가지는 부자에 대해서 '어리석다'는 평가를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부자의 어리석음은 생명은 여호와께 있으며 여호와가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많은 소출은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 부자를 두고 '어리석다'라고 평가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가 부자처럼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은 잘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세상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듣고 있습니다. 많은 소출을 바라보고 든든한 마음을 가지는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좋은 자가용을 타고 싶은데 귀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으로서 몸과 귀의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귀로 듣는 것과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서로 일치가 안되는 갈등입니다.

세상의 어리석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소출이 자기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게 붙들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은 "생명은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란 굳이 돈많은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 채 오직 소유에 모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탐욕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욕심의 죄의 깊이를 제대로 인식할 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여지는 종말의 새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소를 종말이라는 삶의 끝으로 옮겨 놓고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문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삶의 끝에서 자신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이라는 현실에서 자신을 보려고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고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가치라는 것을 버리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들었던 것은 세상의 현실입니다. 세상이 어떤 현실에 있는가를 요한의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현실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볼 수 있는 현실입니다. 즉 하늘나라에 눈이 뜨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볼 수 있는 자는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 한분이 귀하신 분이고 그분을 따라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으며 성공한 인생임을 말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16절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1: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결국 계시록 마지막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처음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계시록의 모든 말씀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되어질 일을 다 알고 나니까 자연히 인내하게 되어지고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현실이라는 조급함으로 인해서 기다림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현실을 본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말입니다. 그러나 되어질 일을 바라본다면 이내하고 기다리고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늘의 일을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오라는 초청의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값없이라는 것이 주님의 영광스런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없습니다. 대가는 주님이 우리 대신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우린 다만 나아가서 마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면 되는데 못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어떤 주인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할 일을 이유로 내세워서 초청을 거절합니다. 자신의 일이 중요할 뿐이지 잔치를 배설하고 초청을 한 주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저는 자들이 초청을 받습니다. 이들은 자신을 불러준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천함을 알기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잔치에 부름을 입었다는 것조차도 송구스러워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듣는 자도 오고 목마른 자도 오고 원하는 자도 오라고 말합니다. 누가 과연 오라는 말을 듣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겠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악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멸망 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을 입었다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오라는 초청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생명수를 받았으니까 그 대가를 내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초청한 주인에게는 기쁨인 것입니다. 애초부터 대가를 바라고 초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초청은 삶의 종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곧 생명이고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참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삶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그리스에게 가는 것보다는 새로산 밭에 가보는 것이 더 급하고 새로 산 소를 시험하는 것이 더 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말씀에 기록되어진 대로 반드시 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18,19절에서는 누구든 이 말씀 외에 더하면 말씀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하신다고 했고 제하면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에서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 그대로 믿는 자들이 생명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 그대로 믿는다면 말씀이 세상의 종말을 말할 때 우리 역시 세상의 종말을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은 종말을 말하는데, 우리는 항상 눈앞의 현실을 보고 산다면 그것이 곧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귀로 어떤 말씀을 듣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귀로 듣는다는 것은 들음으로서 몸이 다스려지기 위해서입니다. 들음은 들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스려지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듣는 것과 몸이 추구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면 그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도 믿어야하지만 돈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더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재앙이 더해질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고난이고 희생이고 고통입니다. 그런데 오직 세상의 축복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생명나무에서 제하여 버림을 받을 모습인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생명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힘이라는 것을 증거할 뿐입니다. 이 말씀을 들었고 믿는다면 돈을 추구하는 자신이 몸에 대해서 애통해함과 회개함이 나와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20절에 보면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속히 오리라고 하시니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을 합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에서만 나와지는 화답입니다. 진심으로 자기 인생에서 그리스도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자들만이 하는 화답입니다.

'오시옵소서'라는 말은 성령에 감동된 그리스도의 신부가 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신랑이 오기 전에는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이 신랑을 사모하는 것도 없이 살아가다가 신랑이 오면 기쁨으로 맞이하겠다는 것은 없습니다. 신랑이 오기를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들만이 신랑을 맞이하고 혼인잔치에 참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한 몸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둘이지만 둘이 아닌 하나인 신비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인간의 죄로 인해서 깨어집니다. 깨어진 관계가 그리스도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즉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성도가 한몸되는 것이 혼인잔치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계이며 신자는 바로 이 나라와 의를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을 마치면서 진심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슴에 못박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종말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은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나서 세상을 향하려고 합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생명임을 아는 신자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다스려지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성경은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부자입니다. 주기 위해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줄 것은 돈이 아니라 주님이 은혜와 사랑입니다. 은혜와 사랑을 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은혜와 사랑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복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여러분이 마음에 주님이 더욱 굳건히 자리하게 되고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하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