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2 종

오늘부터 로마서를 강해합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오늘날 신자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이유를 1:11절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은사란 복음을 의미합니다. 즉 복음을 나눠주고 복음 위에 든든히 서게 하고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선택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종은 복음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소식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따라서 종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 1장에 보면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오심은 자기 백성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자기 백성이 아닌 자에게는 심판의 소식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곧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복음이 떨어지는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구별입니다.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가 복음에 의해서 확실하게 구분됩니다. 이것이 복음이 있는 자리에서 필연코 발생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 심판과 생명이라는 구별의 기능으로 세상에 투입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있는 곳에는 구별은 필연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백성일 것이고, 복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백성이 아닌 자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인정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느냐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애당초부터 인간의 기대와 사고방식에 합류하여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본성과는 부딪히고 반대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자기를 믿지 말고 자기 밖의 신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인데 자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믿지 않을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구별은 결국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않은 자로 나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백성'이란 스스로 자신의 지혜와 깨달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선택하셔서 그리스도가 믿어지도록 하신 사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제가 한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복음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도 없고, 복음을 전해서 누군가를 구원시켜야 할 책임도 없습니다.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부를 자는 부르시고 버릴 자는 버리십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큰 실수입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잊어버린 채 자기 교회에 다닐 교인 만들기 위해서 복음을 자기 멋대로 이용해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복음은 현 세상과 충돌합니다. 즉 복음이 있는 곳에는 필히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인간의 종교성과 충돌하는 것이 복음이고, 세상 사고방식과 충돌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현 교회는 복음 안에서 충돌될만한 위험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버렸습니다. 충돌은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멋대로 충돌 요소들을 제거하고 대신 화합하고 이해될 요소들을 삽입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변질입니다. 복음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고집하면서 복음을 이용해서 자기 교회를 키우고 자기의 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현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참된 복음이 떨어지면 세상의 반응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자기의 현재적 복음을 고수하고 자신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참된 복음을 밀쳐버리고 그 복음을 들고 온 자를 핍박하고 내어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해서 알 수 있고, 또 복음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힘썼던 사도들의 일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일컬었을 때 바울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만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전도를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시각으로 개척교회를 많이 세웠다는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가 어느 정도 잘되면 또 다른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우는 참으로 이상적인 목회를 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지 부름 받은 종으로서 복음을 전했을 뿐이지 믿는 자가 생기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결코 그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알았기에 고전 2:1-5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관한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은 전혀 개입되지 못합니다. 즉 내가 믿었다는 말이나 내가 전도했다는 말이 통용될 수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인간에 의해서 선택되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선택한 자기 백성을 복음이 찾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믿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걸림돌이 제거되고 충돌 요소들이 사라진 것은 이미 복음이 아니라 사단의 유혹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오해합니다. 자기 의지로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해서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미 복음에서 멀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포기하게 됩니다. 믿은 것이 아니라 믿어졌다는 개념에 이해하게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을만한 자질이 없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리스도가 주로 믿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 인간에게 투입된 결과입니다.

이 복음을 깨달을 때 여러분은 복음을 맡은 자가 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이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목사나 장로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종은 복음을 받은 모든 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복음을 알았다는 것은, 복음을 알았으니까 혼자 믿고 구원을 얻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을 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을 알고 구원을 얻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사라져 버립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다만 나를 구원해준 하나님께 대한 보답 또는 선심 쓰는 정도로 여겨버립니다.

종의 할 일은 복음, 즉 선지자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한 아들에 대해서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 모든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누군가를 믿게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 욕심이고 자기 포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종이니까 다른 사람과 신앙이 달라야돼' 이런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자꾸 다른 사람과의 차별된 신앙에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평생토록 신앙에 대한 만족이 없이 갈증 속에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종답게 되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말하라고 한 것만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설사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기고 자신의 집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종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이런 일에 학력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신학교를 나와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목사가 돼야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것이 종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시고 부르셨을 때 여러분께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을 알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살아갈 것을 원하실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복음을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자질이나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믿어졌을 뿐이고 믿어지게 하신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러분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복음이 믿어지도록 하셨겠습니까? 여러분을 천국가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을 복음을 담아서 전하는 그릇으로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주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만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고 택정함을 입은 자의 할 일입니다.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며 그리스도를 전할 것이냐는 것은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것까지 우리소관으로 여겨버리면 결국 우리 스스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 계획을 위해서 스스로 설칠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열심히 하는 것만이 종다운 것이 아닙니다. 종은 실컷 놀면서도 종으로 살 수 있습니다. 놀면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면 됩니다. '내가 이렇게 놀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라는 고백 속에서 논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반발을 하고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자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여러 형태, 여러 환경,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복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여러분을 통해서 보이실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자기의 환경 속에서 순종하며 그리스도만 보이는 것이 종으로서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의 심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택정함을 입은 자는 심판을 압니다. 따라서 심판을 아는 자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은 심판에 대해서 경고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미리 약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라고 부르심을 입은 사도들은 어떤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심판주이시고 참된 생명은 그리스도안에만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종입니다. 이것이 주인 되신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종의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