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8-13 아들의 복음

지난 시간에는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아들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아들을 보내신 이유를 단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해 버립니다. 아무런 걸림돌도 없이 십자가를 믿는다고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이 되는 줄로 착각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교회만 나오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 복음이 수단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복음 안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참 신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버렸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오늘도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할 줄로 압니다. 오늘도 우리는 복음을 바라고 나왔지만 과연 복음 안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목마른 심정으로 나왔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생명에 대한 우리의 무능과 악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그분을 의지하겠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복음의 모든 문제가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주님이 죽음의 길을 가셨다면 나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이 십자가를 향한 믿음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도' 즉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전도란 아들을 전하는 것이지 사람을 붙들어서 교회로 끌고 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전에 신자는 교회에 올 때 믿음이 없는 자로 와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전도를 받아야 할 사람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일회용이 아닙니다. 복음은 한번 맞으면 평생토록 병에 걸리지 않는 예배주사가 아닙니다.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는 복음을 들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조언 받는 시간으로 여깁니다. 믿음에 부족한 부분을 목사가 지적해주고 신자는 그 지적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수정하고 보충해 가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30년을 믿었든 40년을 믿었든 상관없이 오늘 여러분은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즉 전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오늘 이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게 되었다면 성령이 여러분을 전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사람을 교회로 끌고 오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냥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는 것만 말하면 여러분의 할 일은 다한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함으로서 몇 명이 교회에 왔는가? 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전도를 하나님의 일이 아닌 인간의 일로 바꿔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미혹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내 행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행위에 대한 효과가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단의 마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단의 마음에 빠지게 되면 자기 전도로 교회에 온 사람이 없을 때는 낙심하게 되고, 단 한사람이라도 있게 되면 마음 뿌듯해하면서 자기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집중시켜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서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신자는 아들이 있다는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합니다. 9절에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아들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들이 기쁜 소식이지 하나님이 기쁜 소식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입니다. 왜 하나님은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아들이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아들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지 이 점을 알지 못하면 신앙의 방황 속에서 전혀 엉뚱한 신을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들을 믿는 것이고 아들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는 분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나선다면 과연 그 신지식은 바른 것일까요 바르지 못한 것일까요? 분명 바르지 못한 지식입니다. 인간에게는 신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자기의 신지식을 가지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안다고 하는 하나님은 모두가 인간의 신지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짓 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땅에 오신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11절에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란 '복음'을 말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15절의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병고치고 방언하게하고 귀신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려고 가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 즉 기쁜 소식에 대해서 마음을 굳게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믿음이 견고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오직 아들로 가득한 것을 뜻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에게 당신이 말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입니다. 바울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를 위한 기도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견고케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형식적으로 '교회 잘 다니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흔히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이 '교회 잘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 잘 다니는 것이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견고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남을 위해 기도할 때도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견고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알게 되고 심판의 나라인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를 아는 내 자신이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힘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복음이 전해지고 그리스도가 보여지는 도구로 쓰여지는 일에 충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를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절에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첫째는 있는데 둘째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8절에서의 첫째는 순서적인 의미로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먼저고 저것은 나중이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렇다는 뜻으로 첫째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이다는 것입니다.

아들로 기뻐하지 못한 자는 그 기쁨을 인위적으로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부흥회를 다닌다든지 기도원을 간다든지 자신의 종교적 노력으로 기쁨을 채우려고 하게 되지만 잠시 지나면 또 다시 마음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아들로서 꽉찬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오신 아들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여러분이 아들 앞에서 무능하고 형편없고 악한 자신의 모습으로 완성자로 오신 주님 앞에 나오신다면 신자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땅의 것은 의미 없음을 알고 위에 것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올 때 주님의 귀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산다면 내가 못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사단이 방해합니다. 1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지만 지금까지 길이 막혔다고 합니다. 바울의 길을 막은 자가 누구입니까? 살전 2:18절에 보면 사단이 막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바울의 길을 막은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복음으로 살기를 소원할 때 여러분의 가는 길을 사단이 방해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마음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 문제에 빠지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복음에 견고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나의 악함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으로 시작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마음껏 복음을 드러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