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은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 위함이었고, 신령한 은사는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알게 된 예수님을 서로 나누는 것이 사도로서 해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과 나누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은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하셔서 믿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하신 그 결과로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에 대해서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신자를 견고하게 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주님이 일하신 그 덕분에 생명이 주어진 기쁜 소식, 복음을 나눠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 하나로 믿음의 모든 문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믿는다'는 고백은 수없이 하고 있지만 정작 흔들리고 약한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신령한 은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복음의 의미에 깊이 빠져 있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기쁨이 없고 견고함이 없이 수시로 흔들리는 믿음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견고한 믿음이란 자기를 포기함으로서 시작됨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신령한 은사, 즉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신자는 오직 주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자연히 자기를 포기할 수 있고, 자기가 포기되어진 이상 자신의 일 때문에 흔들리고 낙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나눠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생각하는 전도의 의미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빚진 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4절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흔히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도 옛날에 선교사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복음이 들어 왔겠느냐. 우리 나라가 이렇게 복음이 왕성하고 전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은 모두가 선교사들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선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의 빚을 졌다.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부지런히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거의 모두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빚을 갚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복음의 빚을 졌다고 한다면 그 빚을 우리가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복음의 빚이라면 당연히 생명의 빚입니다. 과연 그 생명의 빚을 우리가 갚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복음을 받았으니까 이제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믿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빚진 자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알게 하셨다면 그것은 구원받고 잘살아라는 뜻으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계획에 도구로 부름 받은 것이지 개인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것은 뭔가 할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복음을 담을 그릇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름 받은 자의 할 일은 복음을 담아서 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음을 알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은 나를 복음을 나눠주는 그릇으로 쓰시고자 함이다' 이것이 곧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누군가를 부르셔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그 복음을 나누도록 하십니까? 그 이유는 세상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결국 바울은 '나같은 자가 부름 받은 것은 내가 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빚진 자'란 말을 한 것입니다. 즉 내가 잘나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너희들 때문에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말을 결론 내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들 때문에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신자되게 하신 것을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쳐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천국가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면 무엇 때문에 세상에 살려 놓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내 힘이 아니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누군가 복음을 알고 하나님께 나와야 할 택한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고 오늘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우리 개인의 인생 때문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할 일은 복음을 나누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한 바와 같이 로마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데 또 무슨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까? 결국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복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으라'는 복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를 아는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나오도록 하는 차원이 아니라 주님을 앎으로 자신이 포기되어지는 복음을 말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빚진 자로 신령한 은사를 나누기 위해 로마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때가 언제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선교사가 들어온 날이 복음이 들어온 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참된 복음을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으면 뭐합니까? 문제는 바울이 나누고자 했던 신령한 은사, 즉 참된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종교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할 때 오늘 우리가 마음 깊이 살펴야 할 것은 '내가 참된 복음을 아느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복음을 아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면 그것은 나 말고 누군가 때문에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주님을 알게 하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을 통해서 복음이 나눠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복음을 나눈다는 것은 다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각할 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당에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나 길가는 사람에게 전도지 내어 미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뭔가 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힘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끄럽다'는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 때도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죄인된 인간의 본성적 감정입니다. 부끄러움이란 인간과 인간이 서로 비교했을 때 상대방보다 모자라고 부족한 자신에 대한 감정입니다. 즉 부끄러움은 경쟁과 비교의식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인간과 인간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분입니다. 더러운 인간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낀 인간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벗은 것을 알고 한 행동은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린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하려는 것도 부끄럽지 않은 인간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윤리로 가리고 종교적인 행동으로 가리면서 부끄러움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화과 잎을 벗겨 버리고 손수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앞으로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하나님이 가려주시겠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결국 그 뜻이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의 모든 수치와 허물을 가려주는 것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복음으로 인해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수치와 허물이 가려진 의의 사람으로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입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나를 부끄럽게 할 수 없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사신다면 그 누구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 못한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고, 성경을 잘 모른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고, 전도 못했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하다고, 못배웠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고 계시는데 왜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집니까? 좋은 옷을 입은 자 앞에서 초라한 옷을 입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복음의 능력이 없이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나누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는 결코 복음을 나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부끄러워하면서 복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허물을 가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담대하게 어디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복음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빚진 자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나누는 신자의 능력인 것입니다. 주님의 행동만 의지하는 자에게 복음이 능력입니다. 자기 행동을 바라보지 말고 내 대신 피 흘리신 그분의 행동만 의지하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능력의 복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