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7 믿음에서 믿음으로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립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재능과 힘과 능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오직 '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죽음 앞에서는 누구라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인생의 헛됨과 허무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음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다가왔을 때 비로소 죽음을 깨닫게 되는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평소에는 죽음이 자기와 멀리 있는 것처럼 세상에 자기 것을 남겨놓기 위해서 기를 쓰고 살아가다가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인생의 무상함을 알게 됩니다. 죽음은 바로 내 발 앞에 엎드려 있는 실체임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죽음의 실체를 의식하고 산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점이 등장합니다. 믿지 않는 자도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자가 있습니다. 인생의 헛됨을 미리 알고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인생의 허무함 때문에 세상에 대한 집착을 잃어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인생의 허무함 때문에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인생보다 더 소중한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발견했기에 세상에 미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죽지 않은 자는 새로운 세계를 알 수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란 부활의 세계입니다. 죽고 다시 산 자들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주님이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소망이고 힘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알지 못한 자들이 이러한 말을 들으면 허무맹랑한 말로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이 없었다면 이런 말들에 귀를 막고 돌아섰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말씀들이 나에게 힘이 되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지표가 된다면 그것은 내가 믿음 안에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한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그 말씀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의 실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을 죽은 자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2:17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정해진 인간의 운명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인간의 운명은 죽음 안으로 던져졌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죽음에 처한 것입니다. 그 죽음은 인간을 '무의 상태로 빠뜨렸습니다. 이 말은 이제 인간에게서는 생명이 되는 그 어떤 모습도 나올 수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상태입니다. 생명의 조그마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존재, 이것이 인간에 대한 바른 진단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실체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해서 이런 진단을 내리고 말씀을 대하여야 합니다. '나에게서는 생명이 되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죽음의 흔적만 보여지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 진단이 내려진 자들만이 믿음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복음이 기쁜 소식인지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가장 기본적이면서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쁘다는 것을 감정적으로 느끼고 있느냐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은 느끼고 싶다고 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깨닫는 가운데 자연히 알게 되는 기쁨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의란 땅에 있는 의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진 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모든 의를 부정하고 내려옵니다. 하나님은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의가 없는 세상에 의가 있게 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의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의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의의 극치라고 여겨지는 행동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의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그 어떤 의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때 자연히 보여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은 의를 행할 수 없는 죽음의 존재다'라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아무나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항상 불가능에 대해 끊임없는 도전을 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토대로 해서 인간의 능력과 가능성을 나타내 보이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이 '너는 아무 것도 못한다'라는 말에 수긍 할 리가 만무합니다.

분명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의가 우리를 살립니다. 그러나 복음이 주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과 같이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지도 않는데 영생이 주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은 죽은 존재이고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자기포기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 믿음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질문을 할 때 답은 '없다'입니다. 인간에게는 애당초부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자질도 없고 믿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가 외부에서 주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의가 주어졌을 때 그 의를 믿을만한 자질이 애초부터 있었다면 그 자질을 갈고 닦아서 믿음으로 발전시키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굳이 하늘에서 의가 주어져야 할 필요성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고 계시는데 정작 우리에게서는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이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란 곧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롬 3:2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하는 분은 예수님이고, 따라서 율법 외에 한 의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예수님께서 믿음 없는 우리들에게 믿음을 나눠주셔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 바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일이고 그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간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오셔도 내가 안 믿어주면 그만이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자기 믿음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가짜 믿음이고 그 가짜 믿음으로 믿는 예수는 가짜 예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놀라우신 은혜이고 사랑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믿음 없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믿음을 나눠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고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십자가 지신 것은 주님의 일이고 그것을 내가 믿겠다는 것이 되버립니다. 결국 나도 뭔가 한 일이 있지 않느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 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더 자신에게 접근이 되고 사실화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감사하고 기쁨을 누리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자기 행함에서 믿음을 끄집어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지신 것을 내가 믿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낱낱이 증거 되었습니다. 만약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믿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믿음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해낸 믿음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도 책임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 자들입니다. 즉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라면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 놀라운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내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것입니다. 자연히 자기 자랑도 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복음을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눠주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스스로 예수님을 드러내고 증거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만 묵상하면서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은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의의 도구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