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8-19 하나님의 진노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다시 간단히 설명을 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이 세상에 복음이 주어져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죄악된 세상에는 인간을 구원할 만한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타종교는 세상에 의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의를 인간 스스로 지키고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또 따로 의를 가지고 올 메시아가 필요 없지만, 기독교는 이 땅에 의가 없음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서는 필히 의를 가지고 오실 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메시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의가 없다면 의되시는 분을 믿을 의도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의로 오신 그분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을 나눠주지 않으면 믿을 자가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역시 인간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의인은 이러한 믿음을 보여야 할 사람들인데, 오직 하늘의 의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믿음을 얘기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부흥사들이 흔히 써먹는 수법 중에 하나가 '지금 이시간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신 분은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결단을 유도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에게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시간 예수님의 영접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함으로서 예수를 믿는 것을 순전히 자기 결단에 의해서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교회에서 예수님의 할 일이 뭐겠습니까? 믿겠다고 외치면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복이나 주고 하는 일이나 잘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은 인간에게는 예수님을 믿을 만한 자질이 없다는 것을 전혀 상상치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불의라고 말합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말합니다. 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단지 로마에 가서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이 복음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모든 의를 포기하고 오직 하늘로부터 나타난 의만 의지할 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내 믿음 가지고도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할 때 의가 되는 행동을 부지런히 행하고 법을 지키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인간에게 바울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주 아래 있는 자임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하늘의 의를 바라볼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포함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란 항상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만 취하고 거북스러운 것은 밀쳐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습성이 복음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밀쳐 버리고 오직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의만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자기 것으로 취함으로서 나 또한 의인으로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들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에 대해서 진노하시는가하면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입니다.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너무 타락해서, 성적으로 너무 문란해져서, 그것 때문에 진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노는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치 않음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려면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됩니다.

약 1:27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건이란 어떤 모양이나 행동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아니 하는 그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구제를 한다고 해서 경건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서 진노할 명분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은 구제를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아 과부를 돌아보라는 것은 자신을 약자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사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피조물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제각기 재주와 힘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열심히 하면 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사는 세상입니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불의는 무엇입니까? 역시 불의를 알려면 의가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창 15:5,6을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역시 의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의가 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입니다. 즉 믿음이 의입니다. 지난 시간에 의인은 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을 보여주는 자임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불의함이란 어떤 불의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사는 것 자체가 곧 불의입니다.

이와 같이 경건치 않음과 불의는 모두 인간의 행동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내세워서 '나는 의롭다'라고 한다거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벗어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경건치 않음과 불의함에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얘기하지 않고 복음을 얘기해 버리면 복음을 받을 수 없는 자가 복음을 받게 된 고마움이 아니라 당연히 복음을 받아야 할 자가 받았다는 의식을 가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의를 의지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인간이 죄가운데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내가 죄가운데 있는 자임을 알므로 인해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의가 귀하게 여겨질 것이고, 그 의를 통해서 자기 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은혜를 말하면서도 세상과 똑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우리는 나를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평생토록 주님의 의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는 신자가 의인이며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