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9-20 핑계치 못함

인간의 신지식은 사랑과 자비를 토대로 하여 구축됩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신지식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신에게 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발견될 때 그것을 앞세우고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고, 신의 노여움을 살만한 특별한 나쁜 것이 보여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닥쳐올 때 신에 대해서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나쁜 결과가 주어진 것에 대한 반항입니다. 그리고 신에 대한 존재를 부인해버립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사랑 받을 자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 사랑 받아야 할 자들이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니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는 반항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인간들의 보편적이 사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 내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릴 때도 언급했지만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고 신을 평가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 보이는 자가 잘되고, 믿음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고 상벌이 확실하신 분이다'는 시각을 가지는 것들이 바로 믿음 없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무슨 선한 것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집니까?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인생을 더듬고 또 더듬어 봐도 여러분에게서 나온 선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노를 받아서 멸망에 빠져야 할 조건만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 것을 내어놓으면 사랑 운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가지고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왜 의가 없는가?' '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기다려야 하고 그분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만약 이점을 도외시하고 하나님의 사랑만 말하면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만 요구한다면 우리는 결국 고개를 들고 떳떳하게 '감사합니다'를 내뱉으면서 감사할 거리가 주어진 자신에 대해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보다도 감사할 조건이 적은 신자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감사란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표출되는 감사를 말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감사는 감사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아는 신자는 진노 아래 죽어야 마땅한 죄인에게 다가온 구원과 사랑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 한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더욱 자신의 더러움과 악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된 신자로서 사랑을 알고 감사하는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진노 아래 있는 이상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지옥 가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미 모든 인간이 악한 죄인이고 지옥가야할 처지인데 그속에서 또 따로 악한 자를 골라내서 지옥 보낸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설마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좋은 일 하면서 착하게 사는 사람은 천국 보내시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인간의 신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19,20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의 속에 보인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에서 나타나는 신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신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신을 찾고 하나님을 찾지만 그것은 결국 신을 따르고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20절에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말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분이 영원토록 보이지 않는 분으로 계셨다면 인간으로서는 할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보이지 않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느냐?'라는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못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보여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능력과 신성이란 '하나님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 만드신 만물에 스스로의 흔적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얼마든지 만물을 통해서 신에 대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보이는 것 속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다.

다시 말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 속에 그 흔적을 두심으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다만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보이는 것 속에 나타나신 것뿐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졌다면 보이는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신지식은 인간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갔습니까? 보이는 것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절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지만 보이는 것 자체를 믿어버림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진노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오시되 무시 받고 멸시받을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의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믿지 말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완전히 초월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또 다시 보이는 것을 확보하려고 하고 그것을 힘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 받아야 할 인간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섬기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됩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우리에게는 이러한 자질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고치려고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고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만 인간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요구에 충족될 수 없다는 절망에 대해서 선언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절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그분만을 최고의 의로 삼고 살아갈 때 우리는 보이는 것을 초월하고 주님만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참된 의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