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3:8-10 사랑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뭔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도저히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단지 성경으로만 받아들일 뿐, 우리의 삶과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다만 사랑을 행하는 성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항상 내가 중심이고 자기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쪽에서 이웃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고 도와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매어 있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의 희생이 없는 사랑을 말함으로서 사랑에 대한 부담감을 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롬 1: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빚을 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입은 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이 구원받을 만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부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자에게 빚을 졌다는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도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신자란 서로가 사랑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로 살아갈 책임을 진자이지 사랑 받아야 할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된 자는 교회에서 '누가 나를 사랑 안해준다'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할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안타까워해야지 이웃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섭섭해한다면 사랑의 빚을 진자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과연 여러분이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준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빚을 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받아낼만큼 사랑을 했습니까? 사랑을 한적도 없으면서 사랑을 해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억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사랑을 받고자 하지만,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사랑 받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임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적이 없는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린 모두 그리스도에게 사랑의 빚은 진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빚을 졌다면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랑하신 그 사랑에 보답한다고 할 때 많은 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예수님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합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 보는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를 구원하였습니까? 목사가 여러분을 위해서 피흘렸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시고 희생하신 사랑을 베푸신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나 목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에게서 받아야 할 사랑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앞에서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에는 수많은 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을 하나하나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많은 계명은 단 하나로 모아 버립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 안에 구약의 수많은 계명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9-10절의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는 말씀에서도 역시 모든 계명은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세분화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 간음하지 말아야 한다.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하나 계명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사랑이 있으면 그 계명은 지켜지는 것이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라는 말을 안해도 사랑이 있으면 자연히 그 계명은 지켜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는 계명을 잘 지키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계명이 목적하는 것은 사랑을 아는 자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 아닌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을 아는 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계명이 주어진 배경은 그들이 애굽에서 인도함을 받고 나온 것에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살아나고, 홍해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희생의 피입니다. 이스라엘이 살아날 가치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은 어린양의 피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로 이것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도 계명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계명을 통해서 자신들이 결코 살아날 가치가 있는 자가 아님을 새롭게 인식을 해야 합니다. 홍해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애굽 군사들과 이스라엘이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자연히 어린양의 가치가 사라지게 됩니다. 어린양의 가치는 죽어 마땅한 자를 살리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죽어 마땅한 자로 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무리 유월절을 지킨들 그것은 단지 의식일 뿐 이스라엘 안에 어린양의 피가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살아간다면 자신들은 누구에게도 사랑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그 증거는 이웃을 통해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에게 돈을 주고 도와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사랑의 결과로 돈을 나누게 될 수도 있고, 어려울 때 도와주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결과일 뿐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조건 없이 사랑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조건이 있습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고, 뭐든지 아끼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웃 사랑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악에 대해서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웃이 악을 행한들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이웃에 대해서 그 사랑이 증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지배되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해야 할 자와 할 수 없는 자로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 그런 구분을 하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구원 얻을 자는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역시 이웃에 대해서 구분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율법을 이루는 삶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아느냐 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알게 된 자는 그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이웃을 대할 때에도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고 율법을 완성한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