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3:11-14 낮과 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둠의 세상에 그대로 남겨두신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 여러분들을 학교에 보내시고 직장으로 보내시는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우린 신자라는 이름만 가진 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삶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신자의 삶이라고 해서 불신자와 다른 특별한 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불신자는 하는 일마다 안되는데 신자는 잘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신자 역시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일이 잘 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남아 있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말씀은 '이제 자지말고 깨어나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느냐에 대한 물음입니다. 만약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의 가까움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는 '이 시기'를 아는 자입니다. 시기를 안다는 것은 자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시대의 위기를 아는 자임을 뜻합니다. 시대의 위기란 무엇입니까? 12절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말씀한 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적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회개하라고 한다고 해서 회개할 사람들입니까? 회개란 오직 천국이 가까옴을 아는 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것은 기도원이나 예배당을 찾아서 울면서 자신의 행실에서 나쁜 것을 찾아서 뉘우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열매는 나쁜 행실을 착하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사셨던 모든 삶이 정당한 것이고 옳은 것이며 선한 것임을 알기에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라간다는 것은 막연한 말이 아니라 주님이 사셨던 삶을 살아가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말 역시 세상이 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대의 위기를 아십니까? 혹 자신의 삶의 위기는 잘 감지하면서 시대의 위기에는 무지하고 여러분 자신의 위기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위기는 돈이 없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존의 위기를 가장 크게 느낍니다. 자식이 공부를 못할 때 위기를 느끼고, 물가가 오를 때 위기를 느끼고,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위기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위기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시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밤이 깊었다는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낮이 가까왔다는 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오직 생존의 위기만을 중요하게 여긴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자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밤이나 어두움이라는 것은 윤리 도덕이 타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분을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 우리를 남겨 두신 것은 어둠의 세력 안에서 빛으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빛으로 살라는 것 역시 좋은 일을 하면서 살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시대에서 오직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겨 놓으신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때 우린 또 다시 윤리적인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밤이 되면 나쁜 행동에 대해서 안심을 하게 됩니다. 밤이라는 조건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낮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밤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삶으로 생각할 수 있고, 낮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것은,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을 할 것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단정한 행동이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 호색 쟁투 시기라는 것들은 전혀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탕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고, 술취하지 말고, 쟁투하지 말고, 시기하지 말라는 말씀 등은 우리에게 그렇게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말씀의 결론은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시기가 어떠함을 알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로 옷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옷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신이 벗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수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자신들의 손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단지 몸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가죽옷이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것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인간이 만들어 입은 옷을 벗기시고 하나님이 해주신 가죽옷을 입히시는 것은, 죄의 결과로 발생한 수치는 너희들의 손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가려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죽옷은 신약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죄악의 수치가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수치가 가려진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의 옷이 되었기 때문에, 신자는 다른 것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수치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수치입니다. 이 수치가 무엇으로 가려지겠습니까? 우리의 죄를 세상의 무엇으로 가리겠다는 것입니까? 수치는 오직 그리스도로 가려질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수치가 가려짐을 알고 세상 것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누구신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둠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빛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