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1-6 주를 위한다면

여러분은 이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웃은 단지 우연히 만난 관계로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주변에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 여러분에게 파견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파견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악함을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이웃을 만나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생각해보십시오. 시기하고 경쟁하고 다투고 욕하고 미워하게 되는 그 모든 사건들 속에는 이웃의 잘못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의 악함이 담겨 있는 것이 발견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웃의 관계에서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되는 신자야말로 참으로 지혜 있는 신자이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간섭을 제대로 이해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상, 이웃은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경쟁과 다툼과 비판의 대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이웃들이 우리들로 인해서 어떤 상처를 입습니까? 사랑하라고 보낸 이웃들이 사랑을 커녕 욕을 먹고 비판을 받고 무시를 받고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설교를 하는 제 자신 또한 참으로 부끄러우며 감히 설교하기가 두렵지만 제 자신에게 설교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이웃이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하고 복음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우리들로 인해서 상처를 입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함의 결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아는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머리에 기억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삶에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머리에 기억되어서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그리스도를 말하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에서는 멀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보낸바 된 이웃들로 인해서 말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웃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현대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크게 실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 문제로 인해서 다투거나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때로 싸우고 다투는 문제들이 과연 중요한 것들이 있었습니까? 하나같이 중요하지도 않는 문제들이었는데 불구하고 결국 싸움과 다툼과 비판으로 번지는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멀어진 채 홀로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분명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면 분명 예수님의 생각과 판단도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삶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판단에 의해서 우리들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고 내 생각과 판단을 버리는 일들이 있었습니까? 없었다면 그것은 곧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여러분 곁에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 다른 말을 하는 형제가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대개의 경우 쉽게 그의 틀린 것을 지적할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고 이것이 맞는 것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학교로 전락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맞는 지식을 가르치고 틀린 지식에 대해서 바로 고쳐주면 됩니다. 그것이 학교의 기능입니다. 만약 교회가 학교로 전락된다면 학교처럼 틀린 것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고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지는 보지도 않고 다만 '잘못되게 알고 있으니까 네 믿음도 잘못된 것이다'는 식으로 판단해 버릴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1절에 대해서 예로 든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의심하는 것을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음식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당시 음식으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율법에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음식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음식을 구분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분된 정결한 삶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신자로서의 정결한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더 이상 음식의 규례는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 당시 교회에는 부정한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먹으면 안되느냐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옛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음식을 가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에 서로 다툼과 비판이 발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문제로 삼아서 형제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음식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또 날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떤 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음식을 먹어도 된다'라거나, 날을 지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라는 답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음식을 먹고 안먹고 날을 지키고 안지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따지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서로 자신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경도 모르고 예수도 모른 자로 취급을 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주님의 생각에 의해서 내 생각이 다스려지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곁에 구약의 율법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그를 어떤 생각으로 대하겠습니까? 아마 복음도 모르고 예수도 믿지 않는 자로 여기면서 비판하고 멀리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증표가 음식을 구분하지 않고 먹는 것으로 나타납니까? '네가 돼지고기도 마음놓고 먹는 것을 보니까 믿음이 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또 주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현대교회가 말하는 식으로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주일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까?

3절에서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입니다. 음식을 무엇이든 먹는 자든 구분하는 자든 서로가 판단과 비판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받으시는 것은 음식을 무엇이든 먹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음식을 가리기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기 때문도 아니고 날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받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받으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의롭다 여김 받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해서 기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음식을 가리느냐 날을 구분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네가 주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실 뿐입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곧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사람이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거부하실 사람인 것입니다. 아무리 날을 구분하지 않고 음식을 무엇이든 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증표가 아닌 이상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행함을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행함을 보고 비판을 하고 판단을 한다면 믿음을 행함의 차원으로 바꿔버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또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들 곁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주일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을 보내신다면 우린 당장 그 사람의 행함을 보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으로 단정지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행함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 7절에서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가 아무리 날을 구분하지 않고 음식을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할 사람인 것입니다.

즉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의로 여긴다든지 복의 통로로 여긴다면 그는 믿는 자가 아니라 불신자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 근거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의로 삼는 것에 있는 것이지 음식을 구분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형제들의 행동을 보지 않습니다. 그가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볼뿐입니다. 성도란 서로 사랑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 행함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음식과 날을 구분하는 자를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4절에 보면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하인의 서고 넘어지는 것은 주인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믿음은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지 우리들의 간섭과 가르침으로 인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내가 저 사람을 세워 놓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곧 남의 하인을 내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믿음이 연약하다면 그를 세우실 분은 우리가 하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린 단지 주님에게 사랑을 받았은즉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행함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오직 일방적으로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아십니까? 주님의 사랑을 아신다면 그 사랑의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게 하시고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형제를 통해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비판과 판단이 아닌 오직 사랑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