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9-12 심판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이미 선언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견이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전에 말한 대로 안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안다면 그 앎이 진실된 것임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 도구가 바로 여러분의 삶입니다. 복음을 안다면 복음이 삶에서 묻어 나와야 하고,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흔적이 분명 삶에서 증거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죄인 됨을 안다면 그 증거는 여러분의 삶에서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웃을 대하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10절에 보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심판대는 죄인을 판단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인이라면 심판대는 피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입었기 때문에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라는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분상 의로운 자라는 뜻이지 행위 자체가 의로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는 모든 자에게 해당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책망하는 근거는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설 자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음식과 날의 문제를 예로 들어서 형제가 서로 판단하지 말 것을 말했습니다. 심판대에서 부정하다고 한 음식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를 판단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대는 그러한 것을 판단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기 전에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입니다. 거기에는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잡아먹으라고 하자 베드로가 그럴 수가 없노라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베드로의 거절은 지금까지 율법대로 살아온 자신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한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베드로를 보내는 고넬료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베드로를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고기를 먹게 하기 위해서 환상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깨끗한 것으로 구분하는 인간의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베드로의 문제점은 인간에 대한 구별이었지 음식을 가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대는 우리가 음식을 구분했는지 아니면 날을 구분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았는지를 판단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나 역시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그 누구도 형제를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벽하게 순종하시고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판단하실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 외 모든 사람은 누구라도 그리스도에 의해서 판단 받아야 할 사람일지언정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판단할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마7:1-2절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인해서 내가 비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형제를 비판할 때, 그것은 결국 내가 형제와 똑같이 심판대에 설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워서 침뱉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면 그 비판은 주님의 비판이 되어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크게 실수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옳은 자로 본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복음을 모른 자와 비교하면 나는 의롭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죄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성경을 알고 그리스도도 아는 자로서, 그리고 상대방은 성경도 모르고 복음도 모른 자로 여기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 역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결과입니다.

11.12절에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될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가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일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심판대입니다. 이처럼 나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자고 내 죄를 말해야 할 처지에 있음을 알 때 형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허물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기고만장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형제의 허물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들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마치 자신이 의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을 가지지 않습니까? 살인하고 사기 치고 도둑질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심판대에 서게 되면 그나 나나 똑같이 무릎을 꿇을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9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형제의 주가 되는 분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내가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그 형제의 주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형제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산 것처럼 형제에게 너무나 쉽게 비판을 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도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비판하는 형제의 주가 따로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 많이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 자신부터 나의 주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에 형제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형제에게 허물이 보인다면 나도 같은 허물을 가질 수 있음에 대해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허물을 이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넘어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허물이 없는 자라는 입장에서 형제를 대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같이 허물이 있는 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신자로서 과연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함께 얘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형제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죄인입니까? 입술로만 죄인임을 말하지 마시고 삶이 여러분이 죄인임을 증거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 여러분이 대하는 형제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앞에 허물이 있고 여러분보다 못한 형제를 보내심으로서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실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삶과 죽음 위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심판자입니다. 따라서 심판대에서는 강자와 약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건을 기준으로 삼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경건을 보인다고 해도 역시 결과는 심판대에서 무릎을 꿇을 자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나 자신의 경건과 복음을 도구로 삼아서 형제를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기준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어서 비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경건이 곧 우상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함을 포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행함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쉽사리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경건을 내세우면서 형제와 구별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대는 장차 서게 될 자리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리 심판대에 선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 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볼 때, 내 앞에 있는 형제 또한 내가 판단하고 업신여길 수 없는 귀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