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13-15 형제 사랑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곧 생명으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인간의 타락으로 생명 나무가 감추어지고 그 길이 막힌 것처럼 인간은 생명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로서 증거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날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에는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함께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나'가 아닌 '몸'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15절에 보면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말씀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형제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신 은혜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귀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스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 또한 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자체가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신 은혜가 귀하기 때문에 은혜가 함께 하는 형제 또한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만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지체라고 하면서도 형제를 대하는 것을 보면 형제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식물로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식물과 날을 구분하는 것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문제는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긴다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느냐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업신여깁니다. 음식과 날을 구분한 사람은 구분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구분하는 사람을 서로 믿음이 있니 없니 판단하면서 그가 아는 바에 대해 판단을 해버립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먹는 것이 옳으냐 먹지 않는 것이 옳으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면 그리스도가 그를 무시하지 않았고 업신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무시하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는 형제를 식물과 날의 문제를 가지고 판단하고 업신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실 때 그 무엇도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구분하는지 날을 구분하지 않는지 그 무엇도 묻지 않으시고 몸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라고 하는 우리는 왜 그토록 판단하기를 좋아하고 따져 묻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봐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사는지를 보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지 않으면 배척을 해 버립니다. 마치 자신이 진리의 기둥인 것처럼, 자신이 진리의 판단자인 것처럼 행세 해버립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린 모두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의 대신 죽으심에 있는 것이지 성경을 많이 알고 뭔가를 구분하고 구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면, 우리 역시 형제에게서 찾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누구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애쓴다면 그는 음식을 구분하든 구분하지 않든 주를 위해서 사는 자이고 결국 한 지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귀한 지체라는 관계가 음식과 날의 구분이라는 율법적인 문제 때문에 깨어지고, 누가 옳고 그르다는 개인적인 주장 때문에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신자 개인에게도 판단 능력은 있을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사입니다. 그러나 분별이라는 것도 사랑과 함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남을 분별하라고 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라고 주어진 지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판단은 자신에게 향해져야 하는 것이지 형제를 향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격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은, 우리의 판단이 오히려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고전 8:8절의 말씀을 보면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자유함이 형제를 거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의 믿음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더럽다고 말하는 것을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믿음은 형제의 유익을 위한 믿음이었지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것을 내세우는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형제란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관계이지 음식을 구분하느냐 구분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되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신학을 따져서 나와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은 형제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형제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기준 되어서 편을 가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제,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관계는 서로 도우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지 무엇을 지키고 안지키는 문제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형제가 서로 일치되는 것은 오직 삶의 방향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증거하고 주님이 가신 길로 나도 함께 행하려고 하는 것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세우지 못하는 쓸데없는 것에 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거치는 것을 놓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바로 이것인 것 같습니다. 종교적 실천과 앎에 있어서까지 일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자로 여긴다거나 내가 아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같지 않다면 그를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바로 형제를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성경을 많이 보기 때문에 성경을 잘 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형제된 관계를 성경을 보고 안보는 문제로 인해서 허물어뜨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십자가만을 자랑하자고 모이는 것이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도 없는 문제들을 가지고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히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형제와 함께 나아갈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형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는 거룩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애당초 속된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속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부정한 음식을 속되게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속됨의 문제로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부정한 음식을 구분해도 속되고 구분하지 않아도 속되다면 형제가 속되다고 한 것을 속된 것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딤전 4:4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딛 1:15절에서는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 모든 것이 깨끗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다는 강한 자의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이 깨끗하다 모든 것을 먹으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 편에서만 살아가는 사도바울의 참된 입장인 것입니다.

더러움은 식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먹어야 하는지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문제시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형제로 하여금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갖게 한다면 그것은 형제를 거치는 것이고 망하게 하는 것이며 결국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러분 자신의 것을 내세우고 주장하지 마시고, 어떤 경우에서도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형제를 대할 때도 여러분의 앎과 실천을 기준으로 세우고 대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라는 은혜에 서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형제 사랑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