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가 그 지체라고 할 때 지체인 성도들이 모여서 하는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으로 그 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하는 성도들이 모여서 하는 것들이 단지 조직체인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몸된 교회가 하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며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성령이 일하심으로 나타나는 열매는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을 지향하고 일하시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무것이나 성령의 일로 갖다 붙여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열매에 조직체인 교회의 부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교회 부흥을 성령의 열매, 성령이 일하신 결과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조직체인 교회나 사람인 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진정 성령으로 살아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은 은석교회를 세우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로 우리가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이고, 그것을 지향하고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의 관심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인가에 두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관심은 우리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있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라면 나 하나쯤은 희생되어져도 괜찮은 것이고, 나의 주장은 묵살돼도 괜찮은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이러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양선 온유 절제 자비 등 성령의 열매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껏 식물의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심으로 주님만 섬기고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위하는 교회인가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살펴 볼 때 결론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개인의 사상이나 신학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을 안먹는다는 사람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을 했든 자신의 복을 위해서 안먹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안먹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신학이고 신앙입니다. 반면에 먹어도 된다는 사람 역시 그 사람 나름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대립된 이 신학에서 과연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분명 우리가 이해한 성경 지식으로는 음식에 구분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진리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만약 진리 문제로 여긴다면 음식을 먹어라든가 먹지 말라든가 답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내린 답은 17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을 합니다. 즉 바울이 진리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세워지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음식을 먹고 안먹고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0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힘쓸 것은 무엇입니까? 지체된 형제가 서로 힘쓸 것은 무엇입니까?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는 것은 식물을 먹고 안먹고보다는 하나님의 일이 세워지는 것이 중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세우려고 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세우려고 애를 썼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일에 나의 자존심 같은 것은 헌신짝 벗어버리듯 벗어 던지는 것이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우린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이 무너진다 할지라도 내 자존심만큼은 버리지 못하겠다는 오기를 내세운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자가 추구할 것은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 일을 잊어버린다면 과연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왜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화평과 덕을 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화평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엡 2:14-15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중간에 막힌 담이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담을 헐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저주를 담당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화평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은 곧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화평이란 우리의 싸움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즉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싸움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를 주님이 담당하셨기 때문에 신자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오직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만 우리에게 의가 될 뿐이지 음식을 먹고 안먹고가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체로 하여금 화평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은혜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주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주님이 다 담당하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입술로 고백하면서 실제는 누군가의 행함으로 보면서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0-21절에 보면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여러분은 바울이 무엇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한다고 여기십니까? 바울은 무엇에든지 형제를 거리끼게 하지 않는 것을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형제를 위해서 내것을 포기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에 힘쓰는 것에서 나오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것이 귀하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음식을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약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한 믿음을 가진 형제를 만났을 때 나 역시 약한 믿음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화평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9:20-22절에서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진리로 자유케 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형제를 위해서라면 어떤 모양이라도 거리끼지 않는 것, 이것이 진심으로 자유한 자입니다. 술을 거리낌 없이 마실 자유가 있지만 술을 거리끼는 약한 형제를 위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자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끊임없이 죄를 향해 달려가려고 애를 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나약함을 안다면 형제가 약한 믿음을 보인다고 해서 그를 조롱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과연 누가 자신을 책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형제를 책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책하고 심판함으로 맺어진 믿음일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대해 심판을 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형제를 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책함을 받지 않아도 될 완벽한 인간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신자가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여러분의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실상은 진짜 중요한 것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께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하시고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나타내야 할 것에 힘쓰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내 자존심이 포기되어지는 것이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자유가 형제를 마음 상함으로 이끌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직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