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8-32 하나님을 싫어함

한국교회의 잘못과 타락한 모습에 대해서 지적하는 말을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매우 기분 나빠합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전체를 싸잡아서 매도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가령 '오늘날 한국교회가 복이나 주장하는 무당의 집단이 되버렸습니다'라고 말할 때 사람들의 거부반응은 첫째는 너무 지나친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과, 둘째는 한국교회 전체를 매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나타납니다. '물론 한국교회에 복을 강조하면서 기복신앙으로 빠지는 교회도 있지만 그래도 십자가를 말하면서 예수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교회도 많이 있을 것인데 어째서 한국교회라는 용어를 쓰면서 전체를 매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당신만 옳고 당신 교회만 교회란 말이냐?;'라고 공격을 합니다. '내 교회만 옳고 내 교회만 교회다운 교회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만 옳으냐?'는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잘못에 대해서 심사숙고하면서 생각해 볼 생각보다는 교회 전체를 싸잡아서 공격하고 있는 말에 대한 반발심부터 앞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철저하게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을 통해서 지적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과 싫어하시는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교회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달은 자의 입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의 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너는 얼마나 잘났냐?'라는 공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죄에 대한 지적을 받기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 전체를 싸잡아서 매도하는 듯한 말씀을 보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합니까?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약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대할 때 보이는 반응은 뭔가 빠져나갈 틈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사람들의 틈에 끼이기가 싫어서 하나하나를 자기와 빗대어서 생각합니다. 내가 불의한 일을 했던가 안했던가? 내가 악의가 가득한가 아닌가? 이렇게 하나하나를 자기와 빗대어서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점수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형에 해당하다고 말하는 그런 부류에서 벗어나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것입니다.

이런 본성은 말씀을 들을 때도 잘 보여집니다.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고 따라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며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라고 말할 때 사람들의 내면에서는 반발심이 일어납니다.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할 때, 지금까지 행했던 자신의 선이 생각나게 되고 그 선한 행동을 근거로 해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에 반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한 것이 없으면 자신이 악하다는 것에 대해서 반박을 하지 못할 것인데, 선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오히려 인간의 죄인 됨을 알아가고 주님을 의지하는데 방해물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불의 추악 등 하나님이 합당치 못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두고 자신을 생각할 때도 '물론 나에게 해당되는 부분도 있지만 다 해당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반발을 하면서 자기의 죄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왜 너희가 불의하느냐 앞으로 불의하지 말아라' '왜 탐욕이 가득 하느냐 탐욕을 버리라' '왜 비방하느냐 비방하지 말아라' 이런 식으로 이것 이것을 하지 말아라고 다그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28절에 보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인간 마음대로 살게 되고, 마음대로 사는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들이 불의함이고 추악이고 탐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의 해결책은 '이것을 하지 말아라'가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나온 불의와 추악과 탐욕 등이라면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만 하면 불의함 추악 등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모습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를 항목 하나하나를 나열해서 드러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세상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것은 불신자들의 모습이고, 신자인 저는 이런 모습들과 상관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자기 성공과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꿈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순간부터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존재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 누구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자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은 '나는 내 마음대로 못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제 삼자를 위해서 인생을 살려고 하겠습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인생의 성공을 마음에 부여 않고 태어나는데 그 꿈과 소망을 다 포기한 채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살아가자는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없이 오직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불의, 추악, 악독, 시기, 살인, 분쟁 등의 모습들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불의한 일을 안했으니까 나는 불의하지 않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내가 지금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즉흥적인 느낌과 내 기분만으로 '나는 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한다'고 하지 말고 마음에 하나님을 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가를 생각한 연후에 과연 나 자신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기뻐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만 관심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신다면 결국 우리는 내 인생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내 인생은 엉망이 되어도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그것으로 기뻐합니다.' 진심으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자 하는 신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자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채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어 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했습니다. 멸망으로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것, 이것보다 큰 진노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내 멋대로 살면서 멸망을 향해 가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시고 선택하셔서 간섭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도 좋으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간섭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소서'라는 고백을 하는 자가 되었다면 이것을 어떻게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 하심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너희들은 모두가 악한 자다'라고 말할 때 '왜 우리가 다 악한 자냐 우리도 선한 일을 했다'라는 반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 우리는 죽어 마땅한 악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서 '앞으로 이렇게 안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끝까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되기를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런 인간 되보겠다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죄악을 부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과 악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계시면 한시도 신자로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이기에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자 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이런 신자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마귀로부터 지배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귀의 세력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너는 사단에게 빠져있다'라고 하면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민을 하는 것은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어서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기뻐하는 신자로 만들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