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4:22-23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죄

신앙이란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내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누군가의 강요를 받는다거나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사람을 따라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은 결국 자기 확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확신을 수용하거나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확신하게 되어지는 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자기 확신이라는 말이 때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음을 잘 압니다. 신앙이 자기 확신이라면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말고 내가 생각할 때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따라가라는 것과 같은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내가 생각할 때 옳으면 옳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자기 고집이 되어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자기확신이라는 것은, 남이 가지고 있는 확신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확신을 무조건 자신의 확신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 확신하고 있는 것이니까 틀림없다는 시각에서 받아들인 것이라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때 결국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확신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확신이지 내 확신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느냐 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기 확신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은 고집이지 확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확신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내 마음 깊이 새겨지고 그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내 속에 자리할 때 그것이 곧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확신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그 확신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참된 신앙의 확신은 때로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이나 성경을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많이 오해하는 것은, 내가 확신하고 있는 성경 지식을 굽히지 않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 해석이나 신학을 결코 굽히지 않고 고집하는 것이 곧 확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신학이나 성경에 대한 확신이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확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잘 알았기에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함께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되어주고,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한 자에게는 함께 율법 아래 있지 않은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확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였지 신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세우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었기 때문에, 그 확신 아래서 얼마든지 자신의 자유와 신학을 양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신앙의 확신이란 자신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확신 아래 거하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에 대한 깊은 확신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그분이 증거 되는 일이라면 나 개인의 신학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는 그 모습이 진정한 자유자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22절에 보면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말씀합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는 말은 지금까지 바울이 말했던 모든 것, 즉 음식의 문제로 인해서 형제를 거리끼게 하거나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보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믿음을 자기의 확신으로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자기의 옳다하는 것으로 오히려 자신을 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옳다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으로 인해서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거리끼게 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쌓아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스스로 알고 살아간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이 책망을 받을 일을 쌓아 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성경이나 신학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말합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스스로 부정하다고 여겼던 음식들을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서도 먹는 자들을 말합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서도 왜 먹게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사람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스스로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해도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것이 됩니다. 즉 자신의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안먹으면 되는 것이지 왜 굳이 거리낌을 가지면서도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곧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자신이 믿고있는 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해도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것이고, 따라서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주님을 위하여 하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있는 신자는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으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음식을 구분한다고 해도 주님을 위해서 하려고 할 것이고, 날을 구분해도 역시 주님을 위해서 하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날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누구를 위해서 사느냐로 드러나는 것이지 음식을 구분하느냐 구분하지 않느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음식의 문제로 싸우거나 다툰다면, 또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이니까 내 말대로 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심판을 쌓아 가는 것이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눈치 때문에 기도한다면 그것이 곧 죄일 것입니다.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 헌금을 한다거나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모든 것도 역시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죄일 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자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나'라는 개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체면이 상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증거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증인의 삶으로 맺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