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5:1-7 서로 용납하는 관계

성령의 일은 신학의 지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에 성경 지식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모두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것들이지 개인적으로 맺어지고 증명되어지는 열매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누가 훌륭한 신학을 가지고 있고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는 철저한 성경해석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성령의 열매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이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성령이 단지 어느 한 개인으로 하여금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겠습니까? 성령은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모습으로 오셨고 또 그 모습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있는 성경 지식은 얼마든지 서로 충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의 차이이지 그리스도의 차이는 아닙니다. 14장에서 누누이 강조한대로 음식을 구분한 자와 구분하지 않는 자의 그리스도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구분한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았음을 알고, 음식을 구분하지 않는 자 역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인해서 구원받음을 안다면 그 둘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형제이며 지체입니다. 그러한 관계가 단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의 차이로 인해서 깨어진다면 그 둘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 안에 갇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 아닙니까? 가문이 다르고 혈통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은혜를 감사하며 영광돌리고 찬양하며 모이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이러한 교회가 우리가 각기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지식 또는 주장 때문에 교회 됨이 훼방된다면 그 모든 책임은 우리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결코 우리 개인의 성경 지식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만약 개인의 성경지식을 옹호한다면 사도 바울은 음식의 문제에서 음식을 구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분명 음식을 구분한다는 것은 옛날 법에 매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것을 믿음이 연약하다는 표현으로 대신했을 뿐, 음식을 구분하는 것은 성경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행동이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차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성경 지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있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구분하는 자를 구분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증거 되고 그리스도가 세움을 입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 8: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십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질고를 대신 담당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덕분에 새생명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잘아는 목사의 성경 해석입니까? 성경 해석만 바르게 하면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입니까? 성경 해석이 바르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해석으로 나타날 때입니다. 그 해석이 어떻든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만으로 살고자 하는 해석일 때, 지식으로는 충돌되지만 그 마음은 전혀 충돌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성경 해석을 바르게 하는 자라면,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라면,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해서 항상 자신을 포기하는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니까? 바로 강한 분이신 예수님이 스스로 약한 자의 자리에 들어오셔서 약자의 짐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도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강한 자라면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강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강한 자라면 여러분이 볼 때 믿음이 없다고 생각되는 형제들의 약점을 친히 담당하려고 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에게 강한 믿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스스로 생각할 때 믿음이 약한 자라고 여겨진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도움을 요청하고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척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를 말하나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습니다. 복음만 외친다고 하는 교회에서도 그리스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학지식과 성경해석이 세워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고전 8: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는 이 말씀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심정을 깊이 헤아려 보십시오.

우상 제물에 대해서는 누구나 가진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우상 제물을 먹거나 또는 먹지 않을 때 자기의 지식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자기 지식이 맞다고 생각하고 내 지식을 중심으로 형제를 판단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우상 제물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제대로 안다고 합시다. 음식은 다 깨끗한 것이고 우상은 단지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 앞에 바쳐진 것이라고 해서 더러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먹어도 된다는 지식이 있다고 합시다. 그 지식으로 형제를 바라볼 때 누가 보입니까? 우상 제물은 더러운 것이어서 먹지 않는 형제가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뇌리에 '성경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는 생각이 스치지 않습니까? '난 아는데 넌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든지 아는 줄로 생각하면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땅히 알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을 모르면서 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에 참예한 자가 되었으면서 자기 지식을 기준으로 해서 형제를 판단한다면 그는 알 것을 알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지 신학 지식이 훌륭한 자가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성경 지식이 훌륭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성경 지식이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으로 증거 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은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서 구원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지체된 형제는 서로의 짐을 짊어지는 것으로 만나는 것이지 지식의 싸움을 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갈 6:1-5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이 말씀 역시 몇 번이고 마음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 것 같습니까?

우리의 습성은 누군가가 범죄한 것이 보이면 기회를 만났다는 듯이 달려들어서 그를 공격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책망하듯 자신이 심판자의 위치에서 공박을 하고 마치 신앙이 없는 사람인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형제가 있거든 '온유한 심정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은 너 자신도 범죄할 수 있는 약한 자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심정이란 범죄한 자 앞에서 믿음이 강한 자로서, 옳은 사람으로서 형제를 대하지 말고 나 자신 역시 시험을 받고 범죄할 수 있는 연약한 자라는 위치에서 형제의 약점을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짐을 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연약한 형제의 약점을 담당해야 할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각각 자기의 짐을 질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누가 성경 해석을 제대로 했다고 합시다. 그 해석이 진리입니까? 과연 고칠 필요가 없는 완벽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성경을 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바울의 말대로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자입니다. '나는 성경을 안다'는 생각에서 나올 것은 다른 형제의 성경 해석을 무시하고 부정하려는 모습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다른 형제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틀린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만약 내 성경해석은 그리스도만을 전하니까 옳은 해석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지 않는 자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깨달았다면 그것은 형제를 돕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난 너와 다르다'는 증명의 도구로 쓰여진다면 그는 성경은 알지 언정 그리스도는 모르는 자입니다.

성경은 해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신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신학의 성취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이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형제의 기쁨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내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쪽으로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설사 애매한 비방을 받는다고 해도 참으십시오. 나를 비방하기 때문에 나도 같이 비방하고 공격한다면 그 역시 비방하는 자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비방에도 참게 되는 것입니다.

3절의 말씀은 시편69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참으로 선한 의도이고 목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누가 알아줬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에게 돌아온 것은 비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하신 일에 대해서 누가 칭찬을 하고 보답을 했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비록 선한 의도로 주님을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일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해와 비방일 수 있습니다. 칭찬과 환영이 전혀 없는 결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같이 비방합니까? 같이 공격합니까?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열심히 나의 성경지식을 증거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가 받으신 비방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오해와 비방 속에서 인내를 배울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소망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옳으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강한 분이 연약한 자의 자리에서 친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신 것으로 주님의 옳으심이 증거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말씀합니다. 서로의 뜻이 같은 것, 이것이 바로 형제이며 교회입니다. 생각이 같고 성경 지식이 같고 신학이 같아야 형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만으로 감사하고 살아가자는 뜻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성령은 바로 이 뜻을 하나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뜻이 하나이기 때문에 6절의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을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비방한 자였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받으심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심으로서 하늘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까? 이 은혜를 안다면 형제라고 이름하는 우리 역시 서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에게 어떤 허물이 있다고 해도 그 약점을 담당하고 받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성경 해석을 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자고 떠든다고 해도 형제를 받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말들은 거짓입니다.

옳으신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항상 고침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완벽한 자는 없습니다. 형제가 부족하게 보인다면 나 역시 부적한 자입니다. 형제가 믿음이 없이 보인다면 나 역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이 마음이 온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주장이나 한 개인의 성경 지식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 받으며, 그리스도라는 뜻으로 하나 되어서 한 마음과 한 입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삽시다. 그것이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나를 비방하는 분, 욕하는 분, 모두가 형제입니다. 나를 비방한다고 해서 같이 비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형제라는 관계에서, 내 기쁨이 아닌 형제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원칙아래서 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가 증거될 것이고, 세워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