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일생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누구를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습니까? 우리들입니까? 그리스도 당시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뻐했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적을 보일 때 그 이적으로 기뻐했을지 몰라도, 십자가를 지시는 그리스도를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쁨을 얻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얘기인데,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분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서 예수님에게 임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3:17)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들다운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것을 미리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들로 아름다운 모습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기 기쁨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서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으신 예수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결국 누구의 기쁨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면, 오늘 이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입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기쁨을 억지로 버리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사셨지만,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싫어하셨습니까? 짜증을 내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예수님에게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가령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오직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부모님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아들에게는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자신의 기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조건을 바꾸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전에는 세상에서 잘되는 것만이 기쁨의 조건이었는데,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내 기쁨으로 여기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 자기 기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기쁨이 되는 일을 떠나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억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내 기쁨에 미련을 버리지 못할 뿐입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을 떠나면서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었던 소돔을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의 기쁨을 외치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내게 기쁨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롯의 아내와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억지로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을 내 기쁨으로 여기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자연히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해서 내 기쁨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곧 내 기쁨이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곧 내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보여질 때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도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도 역시 예수님이 살아가시는 삶의 모습들이 바로 성령이 함께 모습이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임을 증거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모습을 우리 마음대로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이 살아가신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한 자는 예수님이 사신 그 삶의 모습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한 대로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대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심으로서 의롭다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즉 담당하시는 은혜로 인해서 아들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백성 역시 담당해주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를 외친다고 해도, 여러분에게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보여진다면 그것은 분명 '주여 주여'하고만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내가 죄인임을 안다면 그에게서는 내 죄를 담당하신 주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넘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 은혜의 능력으로 인해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라는 말씀 역시 내 기쁨 버리고 이웃의 기쁨을 위해서 살라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이웃이 기뻐하는 것을 내 기쁨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웃이 기뻐하는 것을 내 기쁨으로 삼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고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돌아오는 것은 비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돌아온 비방에까지 기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쁨이 곧 예수님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자가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고 산다면 돌아오는 비방에 대해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조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삼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기쁨은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 됨이 증거 되어지는 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으로 증거 되어집니까? 그것은 여러분 주위에 연약한 자, 약점을 가진 자를 보내심으로서 증거 되어집니다. 연약한 자 약점을 가진 자가 있을 때 그의 연약함과 약점을 여러분이 담당하고자 할 때 그것으로 여러분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이 강한 존재라면 그것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주어진 강함인 것이지 결코 약자를 무시하라고 주어진 강함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알게 되고 남들보다 더 깊이 있게 그리스도를 깨달은 분이라면, 그것은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깨닫지 못한 것을 담당하라고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의 옳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가 옳으신 분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 받고 이 자리에 나온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옳은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내 옳음을 가지고 남의 틀린 것을 공격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옳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옳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강한 힘이 있을 때 그것으로 약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세상에서 강함으로 오히려 약자의 약함을 담당하는, 그 짐을 짊어지는 그것이 바로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고 살아가는 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서로 담당해주는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서로 담당해주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증거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곧 여러분의 기쁨이라면 이 일에 부지런하십시오. 여러분 앞에 누군가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면 그는 무시할 자가 아니라 그의 연약함을 내가 담당해줘야 할 형제로 여기십시오. 그것이 곧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