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5:4-7 한 마음, 한 입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충성하고 봉사하고 살아가느냐는 차원에서 계산하면 그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신앙과 비교하게 되는 경쟁으로 나타날 위험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신앙이 되버리면 결국 사라지는 것은 연약한 자의 약점은 담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경쟁이 된다면 항상 살피는 것은 누가 나보다 잘하고 못하느냐 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다른 사람의 연약을 내가 담당하겠다는 마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강한 신앙으로 보여지는 자에 대해서는 시기와 미움으로, 자기보다 약한 신앙으로 보여지는 자에 대해서는 무시와 업신여김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대해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한다고 하면서 정작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소위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싸움은 남보다 뛰어난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싸움은 쓸데없는 싸움이며 유익 되지 못한 싸움이고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남보다 신학의 뛰어남을 갖추려고 하는 것도 역시 쓸데없는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방법이 가장 선하며 합당한 것임을 알고 자신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신자 모두가 이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마음을 복종시킬 때 거기서는 각자 개인의 뜻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마음과 한 뜻만 존재할 뿐입니다.

5-6절에 보면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뜻이 같다는 것은 내 뜻과 내 생각이 포기되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내가 가진 뜻에 대해서 상대방 역시 같은 뜻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 내 생각과 같은 것을 가지고 한 마음 한 뜻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으로 한 마음이며 한 뜻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생기는 것이 다툼이며 충돌입니다. 다툼과 충돌은 각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힘을 가지고 경쟁을 하기 때문에 서로 충돌되는 것입니다.

5절에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서로 뜻이 같게 되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예수를 본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으로는 서로 같은 뜻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야 그 안에서 서로 뜻이 같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빌 2:5-8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로서 사람들같이 되신 것, 그리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배울 때, 그리고 그 마음으로 서로 만날 때 그 마음 안에서 신자는 서로 뜻이 같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반발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 예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은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고난이며 비참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이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에 있어서 잘되는 못되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잘되든 못되든 그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며 끝까지 인도하시고 붙드십니다. 이것을 믿는 신자라면 결국 자신에게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낙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라면 결국 그 결과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때 인내가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안위하심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내와 안위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자된 자로서 믿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으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때로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에 인내하고 안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면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그리스도를 믿어올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인도하셨고, 우리가 낙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멀어질 때 책망하시고 권고하시면서 지금껏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강해서 지금껏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믿음에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한 자에게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가 하나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각기 자기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얻은 결과물로 인식을 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서로 경쟁을 하게 되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신학을 가지고 내 것이 옳다고 우기며 싸웁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것은 한 마음과 한 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한 마음과 한 입이 증거될 때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7절에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시고 받아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거하게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사망의 어둠을 헤맬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주님의 은혜는 우리 역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 받아주는 것에서 증거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업적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신자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신 예수님이라면 우리 역시 연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것으로 우리가 곧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고 있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아버지, 나는 저 세리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지도 않았고, 남의 것을 훔치지도 않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기도에서 보여지는 것은,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남은 다 틀려도 나만 옳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만약 바리새인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그리고 세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삶을 살고 있었다면 그를 권면하고 가르치면서 함께 하나님을 아는 자로 자라가기를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맞는 말만하고 옳은 소리만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을 잣대로 삼아서 누가 틀린 자인가를 가려내는데 너무 능숙합니다. 그리고 틀린 자를 잘라내는 것이 옳은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옳은 것을 알게 하셨다면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틀린 자를 가르치고 권면해서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자리에 오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남보다 더 잘하고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남보다 더 많이 하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리스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과정에서 혹 누가 뒤쳐질 때 함께 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배려하는 관계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어느 한부분도 우리의 힘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잘되든 못되든 그 안에는 변함 없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가 살아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 것처럼 우리 역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도우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서로 받아주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