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5:14-18 은혜를 인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심으로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나 구원받았다'는 것을 감사하고 살아간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되어진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가는 것까지 포함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모든 공로를 두는 것은 단지 신자된 자로서의 고백이지 그것을 순종하는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고백할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삶에서 증거 되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한다고 해서 신자가 아니라 실제 십자가에 순종하는 삶이 있음으로 해서 신자됨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15장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에 대해서 계속 설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더 멋있는 신앙의 삶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즉 누군가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보여지기보다는 오히려 능력 없는 자로 보여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기피하고 싶어하는 것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고 헌금 많이 하면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큰 자로 여기고 그러한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으로 믿음이 인정되고 증거 되는 분위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좋다'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순종한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눈에 보이는 기사와 이적을 나타낼 때는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선지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약점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죄인으로 돌아가실 때는 오히려 배척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사고방식 역시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으로서는 되어질 수 없는 큰 능력의 결과라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신 십자가에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고, 은혜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주어지는 차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을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주님을 위해서 사느냐로 구별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무엇을 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큰 신앙과 작은 신앙으로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말씀하고, 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고 말씀함으로서 지극히 작은 자와 예수님을 일치시키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작은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 자체가 주님에게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작은 자의 짐을 대신 지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에게 행하는 위대한 일이고 큰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큰돈을 헌금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이지 큰돈을 헌금해서 예배당을 짓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이며 그 은혜로 결과로 자신에게서 주어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기에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은혜를 따라가는 삶을 살려고 하게 되기에 은혜가 증거 되어지는 삶으로 자신을 순종시키고자 하기에 약점을 담당하고 짐을 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바울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들이 믿음에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쓰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성도들도 이미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그들 속에 선함이 있고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권하는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을 바울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까?

15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라는 말씀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썼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교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은혜를 서로 나누는 시간이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로 살아가는 삶에 충성하기 위해서 서로 권면하고 주어진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하는 자나 설교를 듣는 자는 서로 동일한 위치에서 주님의 은혜로 교제하는 것이지 목사가 교인을 가르치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설교하는 자는 설교를 목사의 특권으로 생각하고 설교하는 것 자체를 위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자는 설교하는 자를 자신과 다른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존재로 인식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를 생각나게 하려고 바울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담대히 썼다는 것입니다. 담대히 썼다는 것은 은혜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계산 하에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인가 손해가 될 것인가를 따져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은혜란 나누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생각으로 썼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16-18절에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도 바울이 부름을 받은 것은 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이방인을 하나님에게 인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 직무는 제사장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씻음을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즉 제사장의 존재 의미는 죄인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존재 의미도 이방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의 구원이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은 부름을 입을 이유가 없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말할 것은 오직 이방인을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역사 하신 기사와 이적과 능력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그 어떤 기사나 이적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이방인을 순종시키기 위해서 나를 도구로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되어 있는 사도의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잊으면 안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누군가를 그리스도에게 순종시키기 위해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순종시키고 복종시키기 위해서 나를 불러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환경과 상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가지고 실망을 한다거나 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의 일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게 되는 것도,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신 그 이유를 알 때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은혜를 알게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주님의 은혜에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성도는 주저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모든 일에 자신을 순종시키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도 애매하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로 여겼습니다. 빌 1: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힌 것까지도 복음의 진보, 즉 복음이 증거 되고 확산되는 일을 위해서 되어진 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 안에 사는 자의 고백이며 삶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항상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가?' '왜 나에게는 저 사람처럼 많은 것이 없는가?' 등등의 불평을 수시로 내뱉고 살아갑니다. 이런 불평 앞에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임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지고 살아가야 할 짐입니다. 우리가 만약 세상에 진다면 그것은 왜 내가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망각했을 때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누군가를 위해서 있음을 잊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고 증거 하는 삶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