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복음에 대해서만은 그 누구에게도 큰소리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자신만만해 하거나 내 신앙 수준이 남보다 좀 더 나아 보인다고 해서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큰소리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모든 것이 우리들의 힘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말 한마디로 우리는 누구나 주님 앞에서 기죽은 자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의 입장을 잘 말해주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8절)는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에 대해서, 그리고 사도로서 살아가는 모든 일에 대해서 결코 자신의 힘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도로 삼은 것은 이방인을 그리스도에게 순종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며 자신이 행했던 일이며,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모든 것도 자신이 잘나서도 아니고 믿음이 좋아서도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신 성령의 능력이었음을 말합니다. 즉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능력으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개입하신 증거일 뿐이지 결코 우리들의 능력이나 힘이 아님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서로의 믿음을 가지고 경쟁을 한다거나 누구의 믿음이 더 나은가를 따지고 비교하고 자랑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실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일 뿐이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 자체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믿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라며 믿음을 지키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들의 연약한 힘으로는 도저히 믿음을 지킬 수가 없음을 알게 하시고 항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망하며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 한 신자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자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소망하게 될 것이고, 자연히 서로의 연약함에 대해서 비판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용납하고 짐을 지고 기다리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즉 사도 바울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두루 행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나 열심히 되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이방인을 순종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게 됐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신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이지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이룬 전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하는 분도 하나님이시지 결코 자신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쓰여지고 있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사람이 가지 않으면 복음은 전파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10:14절에 보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는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이 말씀은 마치 사람이 가지 않으면 복음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으니까 사람이 가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명을 가지고 가도록 하기 위해서 독려하는 말이 아니라, 15절의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을 놓고 볼 때 보내시는 분은 여호와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이 전하는 자의 입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항상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미혹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미혹에서 전하는 자신은 도구로 감추어 버리고 전하도록 만드시고 보내신 배후에서 나를 붙들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전하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그들이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참된 신자일 것입니다. 그들의 발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발이고, 오직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열심을 내면 잘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공해야 하나님의 일이 성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성공하고야 마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쓰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이 실패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썼을까요? 바울 역시 자신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왜 굳이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까? 어차피 실패할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면 적당히 해도 상관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공로를 포기하지 못한 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지 않아도 실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뭐 있는가라는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함께 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함께 한다는 것은 이미 그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라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인데 하라고 하니까 하기 싫은 것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전도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지가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20절에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 목사들이 이 본문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다른 사람이 개척하는 지역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지 않기를 권면하는 내용으로 이해를 합니다. 즉 남의 교인을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이해를 한다면 그 사람의 관심은 복음이 아니라 내 교회에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 교인을 다른 목사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과연 누군가가 교회를 세웠다면 그 지역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의도로 본문을 말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 된 것은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함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사도된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 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곳에 바울이 갈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 남의 밥그릇에 탐내지 마라는 의도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52:15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왜 복음을 전하는지를 말합니다. 21절의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2:15절의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이 일에 사도 바울을 부르신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일하게 된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자세를 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만을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개입시키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만 모든 관심을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이 앞서지 않고 말씀이 가라고 한 그 자리까지만 가는 바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와 열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질러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을 앞지른 생각이면서도 옳은 일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정당화 해버립니다. 교회 일이기 때문에 옳다는 생각이 때로 말씀을 허무는 모습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자는 항상 조용히 주의 말씀을 살피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행여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 버리는 것은 없는지 살피면서 말씀이 원하는 자리에서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말씀으로 종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