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보면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들의 서신서를 보면 하라와 하지 말라는 말씀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린 이 말씀을 자칫 잘못하면 마치 율법처럼 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라는 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부분으로 하지 마라는 것은 삼가야 할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며 의무로 여기는 것입니다. 가령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가 신자의 의무요 사명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라는 말이나 하지 말라는 말을 성도가 실천해야 할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를 설교하면서 율법에 대한 말씀을 드릴 때 율법이란 우리가 억지로 실천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자연히 율법의 요구한 바를 따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언급한바 있습니다. 사랑하라고 했을 때, 이것을 실천해야 할 문제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동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라면 자연히 사랑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삶은 미워할 자를 미워하고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나에게 득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게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애통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신자가 거듭났다면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던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과 희생과 섬김이라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그럴 때 그에게 있어서 사랑하고 희생하고 섬기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 사명감에 도취돼서 스스로의 의지로 이루어내는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구제에 대한 말이 나옵니다. 25-27절에 보면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여러번 막혔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한 이유는 로마의 성도들과 교제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서바나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은 자신이 가야할 곳을 스스로 정해 놓고 그 지역을 목표로 해서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를 가고자 했든 바울의 마음은 성도를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고자 하는 지역은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성도를 섬기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지역을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섬김이 목적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전도를 하느냐? 어디를 가서 전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를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전도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는데, 과연 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에서 바울은 구제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분명 바울은 구제하라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25절에서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중 가난한 자를 위해서 기쁘게 얼마를 동정한 일, 즉 구제한 것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예루살렘의 성도를 섬기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지 구제에 대한 교훈을 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구제가 바울에게는 예루살렘 성도를 섬기는 일이 됩니까? 먼저 우리가 이해할 것은 예루살렘과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관계입니다. 예루살렘에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들의 대다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이방인과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으로 성도된 자들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0:12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는 말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음식의 규례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이 대합니다. 할례에 대해서도 유대인들과 같은 의식이 없습니다. 이러한 이방인의 믿음을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옳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을 했지만 아직 그들의 의식은 진리로서 자유케 된 수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이방인의 성도는 같은 주를 믿는다고 하고 같은 복음을 말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교제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도들 편에서 더욱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선민 의식이 복음으로의 교제를 훼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이방인 성도들, 즉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이 기쁘게 헌금을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 일을 성도를 섬기는 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28절에서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라는 말씀에서의 열매도 인간적인 이해 관계를 극복하고 맺어진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쁘게 헌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 성도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관계를 쫓아서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나를 욕하고 미워한 자에 대해서는 같이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에게서 보여진 열매는 그러한 인간관계를 벗어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억지로, 누가 명령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게 되어진 구제가 아니었습니다. 기쁘게 했습니다. 기쁘게 했다는 이것이 그들이 인간관계의 이해를 벗어나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동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하겠다고 말합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맺어진 열매가 어떤 것인가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확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서 보여진 열매를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확증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과연 복음으로 살아가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곧 바울에게는 예루살렘 성도를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이방인 성도의 헌금은 성령의 역사가 어떤 열매로 맺어지는가를 오늘 우리에게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성도를 대하는 수준은 어떻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 역시 유대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직 복음만을 보고 모이고 교제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말하지만 결국 나와 같은 조건을 찾아서 교제하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인간관계를 따져가면서 사귈 자는 사귀고 멀리할 자는 멀리하는 모습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도운다고 해도 그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따지면서 대하는 수준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령이 역사하는 열매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굴레를 벗어버리고 오직 복음만으로 교제하고 대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하면 서로 배척하는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서 기쁘게 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보여진 그 열매를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확증함으로서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도를 섬기는 것은 그들을 찾아가는 바울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배척을 당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보지 아니하고 기쁘게 그들을 돕기 위해서 헌금을 한 그것 역시 섬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형제를 섬기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형제를 섬기는 것이 꼭 물질로 도와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울 필요가 있으면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도와주고 잘난척 한다면 그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이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오직 복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만이 배운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것을 보지 않고 복음안에서만 만나는 것, 이것이 형제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이 보여진다면 그것이 곧 성령의 열매일 것입니다. 이 열매가 서로서로에게 확증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서 우리의 본성으로 인한 열매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인한 열매가 서로서로에게 확증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