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참된 믿음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매를 맞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일 등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저는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참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일한다는 생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즉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일하시기 위해서 자신에게 나타내신 것이지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5:18절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기에 바울은 결코 자신을 위대한 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하지도 않았고 믿음의 차별을 두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업적을 남겼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았기에 결코 자신을 위대한 자로 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그 믿음이 자신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다만 그 일에 부름 받아서 쓰여진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참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자신은 쇠하여지고 오직 주님만 높이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니만큼 참된 믿음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위대하게 보지 않는 것으로 증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본문에서도 나타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한다고 할 때는 대개 신앙이 있는 자에게 신앙이 없는 자가 부탁을 한다거나, 교회에서는 평신도가 장로나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게 되는 것이지 목사가 평신도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가 설교를 잘하도록 해달라거나, 교회를 잘 목회 하도록 해달라는 기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 목사가 교인에게 기도를 부탁한다고 하는 것은, 교인이 목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사에 대한 교인의 관심을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자신과 똑같은 믿음의 성도들로 보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믿음이 있고 위대하니까 너희들처럼 예수 믿은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날 위해 기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나 로마의 성도들이나 그리스도 앞에서 전혀 다를 바 없는 성도로 여기는 가운데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위대한 자가 많고 영웅도 많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위대한 자도 아니고 영웅도 아닙니다. 우린 누군가가 한 일을 통해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위대한 자와 별 볼일일 없는 자로 구분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구분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위대한 자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바울은 이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한 일을 내세워서 자신을 영웅시하지도 않았고 다른 성도와 믿음의 구분을 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보여지는 목사와 성도의 구분은 극히 잘못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사는 그 누구라고 해도 위대한 자가 아닙니다. 단지 같은 성도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다른 누구에게라도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연약한 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목사의 믿음은 특별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목사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조차도 황송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와의 관계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교제하는 것이지 결코 낮은 자가 높은 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서로 기도하는 교제를 가질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31,32절에 보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실된 모습을 확증시켜주기 위해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한 돈을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배신자입니다. 이단입니다. 실제로 그동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바울 역시 죽일 기회를 많이 엿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에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구제한 돈을 잠시 놔뒀다가 나중에 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편함과 유익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에 따라 움직입니다. 오직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달했기 때문에, 지금 역시 이방인들의 헌금을 가지고 속히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확증시켜 줌으로서 복음의 진실된 면을 발견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위태로움 때문에 갈 길을 바꾼다는 것은 바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많은 위태로움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라는 것 역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자신이 전해준 구제헌금을 통해서 복음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즉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계속 내세우면서 헌금을 거절하지 않도록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일이 다 끝나고 로마의 성도들에게 가서 함께 편히 쉴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린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유대나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겠습니까? 기도가 필요하면 바울이 직접하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손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알아서 구원시킬 것인데 무엇 때문에 기도해달라고 합니까? 예루살렘 성도들이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라면 그 역시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까? 마치 로마의 성도들이 기도를 해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오해 때문에 발생하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결코 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사 자신이 기도한대로 되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내 기도 때문에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기도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고 있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 손에서 자신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것도, 그렇게 되어질 것을 바라는 자기 염원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유대인의 손에서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유대인의 손에 죽는다고 해도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는 실망을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신자에게 참으로 필요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에 의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란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함께 기도하자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함께 바라보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도 역시 하나님이 쓰시는 대로 사용되어질 수밖에 없는 도구임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