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6:1-2 성도의 관계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는 여러 가지 외적인 조건이 개입되어서 이루어집니다. 친인척이라는 혈족관계가 개입되기도 하고, 같은 고향, 동창 등등의 수많은 조건들이 개입되어 인간관계를 맺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이용가치가 있는 자라는 판단이 될 때는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서의 성도의 관계는 독특합니다. 성경에서는 성도의 관계를 지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말하고 성도는 몸으로서 서로가 지체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을 교회라고 일컫습니다. 이 관계는 세상에서처럼 혈족이나 고향 동창 등등의 조건들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분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세상에서의 조건으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드러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바로 그러한 세상적인 관계로 교회가 유지됨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인간관계는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고 해도 지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한 몸의 관계는 아닌 것입니다. 설령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고 할지라도 한 몸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다만 가장 가까운 관계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아무런 조건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인데도 지체라고 말하고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로 서로 모이고는 있지만 지체나 한 몸이라는 말을 할 때 때론 우리 자신들부터 어색함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남인데 그런 관계를 한 몸으로 지체로 말하면서 가장 가까운 관계의 차원을 뛰어 넘어 아예 나와 같은 지체라고 일컫는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교회에서의 성도의 관계가 한 몸으로 일컫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입니다. 다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며 한 몸이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는 외적인 조건들이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니 친척이니 동창이니 같은 고향이니라는 것으로 끼리끼리 형성되는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써 새생명을 얻었다는 고백으로만 모여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만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서로 나누는 관계로 모여지는 것이지 경쟁과 다툼과 시기의 관계가 전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경쟁 다툼 시기라는 것도 한 몸의 관계를 벗어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가 모여서 서로 시기하게 되고 다투게 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교회를 허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이면 그리스도를 말하고 믿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믿고 있다고 단정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믿지 말고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믿음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차 말씀드린 대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분명히 증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알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산다면 그 은혜는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이 나누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은혜가 서로 나누어지는 현장이 교회이며 이처럼 나눔이 실천되는 교회에서라면 경쟁과 다툼과 시기가 보여질 리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곧 믿음으로 인해서 증거 되는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행함이 아닌 믿음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성도란 서로 받아들이는 관계이며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장의 말씀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을 때 16장의 말씀은 소홀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16장의 말씀을 보면 계속해서 '문안하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성도에게 문안하라는 것으로 바울은 로마의 성도에게 보낸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에게 문안하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인가 생각이 되겠지만 성도는 교회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지체로 모이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문안 역시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의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결국 예루살렘으로 먼저 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인들을 위해서 구제한 헌금을 가지고 감으로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확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기 전까지 믿음이 약한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서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자매 뵈뵈를 로마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자매라고 말한 것을 보면 뵈뵈는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군이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뵈뵈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2절에서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고 당부합니다. 이러한 당부를 하는 이유는 바울 자신이 천거해서 로마로 보낸 뵈뵈가 로마의 성도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경우를 염려한 것입니다.

바울이 뵈뵈를 천거해서 로마로 보낼 때 로마의 성도들은 뵈뵈에게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의지하고 존경하는 바울이 천거한 사람이기 때문에 특출한 기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가 막상 만났을 때는 상대적으로 기대했던 것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자연히 그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게 되고 배척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뵈뵈를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이란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여러분이 서로서로 주 안에서 만났을 때 보여져야 하는 예절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의 예절은 나이 적은 자가 나이 많은 자를 공경하는 것이고, 지위가 낮은 자가 높은 자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의 예절은 옛날 공자의 유교 사상에서 전래되어진 것이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예절이란 공자의 유교 사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적인 도덕과 예절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은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강조한 말씀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모인 교회는 편견이 없고 외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서로 구별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닌 서로 용납하는 관계임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성도가 함께 했을 때 나타나야 할 예절은 외적인 조건을 따지며 구별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편견을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형제로 대하며 그가 약한 자일 때 그 약점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 곧 성도의 예절인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를 스스로 판단하면서 '믿음이 왜 그 모양이냐?'라는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한 개인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 즉 몸을 보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시면서 누구의 믿음이 강하고 누구의 믿음이 약한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섞여 놓으시고는 교회가 어떠한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즉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같이 나아가는 교회인가 아니면 약한 자가 강한 자에 의해서 판단을 받고 무시를 받게 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신앙이 특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함께 자라가는 관계인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믿음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강하다면 그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 짐을 나누어지라고 내 믿음을 강하게 하셨다는 것으로 인정하고 약한 형제를 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서로가 채워감으로서 온전함을 증거 해야 하는 관계로 모이는 것입니다. 온전함은 개인의 능력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연합으로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도를 대할 때 주 안에서 합당한 성도의 예절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성도를 대할 때 내 마음에 드는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형제에 대해서 맡은 역할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역할은 용납하는 것이고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지 형제에 대한 판단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형제를 판단할 때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판단으로 인해서 여러분이 예수님에게 판단을 받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형제를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판단할 자격이 없는 우리이기 때문에 서로 그리스도안에서 용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자라가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교회로 모이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에게 보여야 할 예절이 무엇인가를 말씀 안에서 생각하시고 합당한 예절로서 만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교회의 참된 모습이 증거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