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절에 보면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문안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16절만이 아니라 본문의 전체 내용이 문안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문안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의 말인지 먼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셔서 세운 교회라고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교회다움은 무엇으로 증거 되어진다고 여기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교회다움을 도덕적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증거 되어지는 것으로 말하지만 과연 우리가 도덕적으로 착한 일을 한 것이 교회다움이며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움 받은 교회의 독특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오직 교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교회의 독특함을 통해서 증거 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곳이며 그리스도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개입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바로 교회의 독특함이며 그 독특함이 있음으로서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보여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세상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무엇인가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롭게 됨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결국 새롭게 됨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회다움은 바로 그것으로 인해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교회다움은 무엇으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까? 교회가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음을 교회에 철저하게 잘 모이고 교회 생활에 충실한 것을 통해서 증거 되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믿음을 말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런 모습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몸으로 강조합니다. 12:4-5절에 보면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한 몸으로서 서로 지체의 관계로 모이는 것을 교회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 것입니다(12:1). 따라서 우리는 내 몸을 내 것으로 여긴 채 믿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 자신의 몸은 이미 그리스도의 것임을 알아야 하고,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의 몸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몸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몸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이며 그러한 교회에서 증거 되어지는 것은 내 몸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가 지체로 만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에서 증거 되는 믿음은 자신의 존재성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 몸이 없기 때문에 교회는 몸과 몸의 부딪힘이 없습니다. 몸과 몸이 서로 비교하는 것이 없고 다른 몸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몸이 아닌 지체로서 그리스도라는 몸을 위해서 서로 연합하는 관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다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주님 앞에서 내 죄를 안다고 하고 주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 형제를 용납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거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결코 형제를 판단하고 비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님이 있다면 그 증거는 형제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음으로 증거 됩니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나는 주님만 마음에 두고 삽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여러분 속에 형제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주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 문안하라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안하라는 것은 단순히 안부를 묻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매구절마다 누구누구에게 문안하라고 말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령 3,4절을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하면서 그들을 나의 동역자라고 말하고 있고 그들이 바울을 위해서 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았다고 말합니다. 또 5절에 보면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고 하면서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들에게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고, 또 한가지는 주안에서 문안하라는 말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주안에서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안에 있는 성도들을 주안에서 문안하라는 것은 2절에서 말하는 '너희가 주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라는 말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이란 외적인 조건을 보면서 평가하고 편견을 가지지 않고 대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안에서의 성도의 합당한 예절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안에 있다면 그는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형제로 대하는 것이 성도의 합당한 예절이 아니겠습니까? 설사 그가 세상적인 조건이 나보다 못하고 뒤떨어진 자라고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만을 보고 나와 같은 형제로 여기는 것이 주안에서의 성도의 합당한 예절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안에서 문안하라는 것도 성도를 대할 때 그에게 있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대하라는 의미의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안이란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의 문안은 필히 세상적인 위치를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인사를 오지 않을 때 괘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의 문안은 세상적인 지위를 가지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문안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는 것만 볼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새롭게 하심의 결과이며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서로의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확인하게 되고 주님의 일하심을 발견함으로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기쁨은 주님이 우리에게 믿음의 풍성함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서 주어지는 것이고, 우린 그것을 형제의 믿음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만 믿음생활 잘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형제를 볼 때 그의 믿음이 대단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새롭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일하시는 주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형제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일하심을 확인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형제가 세상적으로 어떤 모습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입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반기며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안에서의 성도의 문안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라는 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지위라는 것이 상관이 없습니다. 돈이 많고 적음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었다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문안하는 것이고 성도의 합당한 예절이며 이러한 문안과 예절로 모이는 것이 교회의 교회다움입니다.
때로 우리는 누군가의 신앙에 대해서 경쟁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을 두고 경쟁을 한다면, 그리고 부러워한다면 그것은 신앙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선물이 아니라 내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내것이 저 사람의 것보다 못하는 느낌이 들 때 부러워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고 경쟁을 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물로 받았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형제에게서 동일한 믿음이 보여질 때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 기뻐하는 것이 온전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나는 못하는데 저 사람은 잘한다는 것 때문에 시기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법칙으로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앞에 누군가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나에게 보낸 형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형제에게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주안에서 만나고 문안하는 성도의 관계이며 이 관계로 모이는 것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라는 것은 분명 인간의 힘으로 세워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크신 능력으로 인해서 세워지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는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확인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바라볼 때 반성할 것은 형제의 믿음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나에게 보낸 형제를 밀쳐내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만 생각하면서 성도를 대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은 보일지언정 형제의 티는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교회로 모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