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6:21-27 비밀의 계시

오늘은 로마서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122주라는 긴 시간동안 주일 오후 시간에 로마서 한 권에 매달려 왔었지만 과연 로마서를 마치는 지금 이 시간에 우리 마음에 무엇이 남아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두려운 마음도 앞섭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한 복음은 무엇입니까? 로마서를 통해서 알게 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십니까? 듣긴 들었지만 다 잊어버렸다는 말은 너무 무책임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교한 것은 마치 학생들이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처럼 암기하고 머리에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의 내용을 잊지 말고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의 내용은 설교를 한 저도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중심으로 설교를 했는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전할 것인가는 제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 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 자신이 어떤 마음에서 로마서를 설교했으며 또 로마서를 통해서 무엇을 전파했느냐에 대한 답은 제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처럼 머리 쓸 일이 많은 세상에서 목사의 설교 내용까지 일일이 기억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필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기억되어야 할 것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122주의 로마서 설교를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자 힘썼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설교의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저의 설교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증거 하신 말씀의 성공이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어쨌든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로마서의 가르침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분명해지고 확고해졌느냐는 사실입니다. 이 물음에 자신 있게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로마서는 능력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이 다 아는 얘기를 하고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비밀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25-27절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는 말씀으로 로마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껏 전했던 복음에 대해서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 나타내신바 된 비밀의 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보면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에 비해서 지금 복음을 대하고 있는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비밀의 계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나 알 수 없는 비밀의 계시가 나에게 들려지고 있고 또 그 비밀이 이해되고 있음에 대한 설렘과 감사함이 전무한 채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복음을 대한 것이 곧 우리들의 마음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고 있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들이 전혀 알지 못한 것을 내 자신이 알게 되었다는 감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남들이 전혀 가지지 못한 것은 혼자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나타내고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그것이 나로 하여금 자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고, 생명이라고 말하고,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이라고 말하면서도 복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과연 복음을 자랑하고 나타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그 마음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 볼 때 참으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복음을 비밀의 계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비밀이란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누구든지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비밀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비밀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비밀의 계시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비밀이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리스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이지 그리스도가 누군지는 알고 있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를 비밀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상식과 지식으로 인해서 만들어 낸 신이고, 그리스도라는 이름만 머리에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착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자로만 여길 뿐입니다. 이것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것은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상식일 뿐이지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비밀의 계시를 전했습니다. 과연 바울이 전한 것이 무엇이기에 비밀이라고 말합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부터 인간에 대한 무능력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만물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에게 감사치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죄인이면서도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죄입니다. 은혜 아래 거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합니다. 이방인도 자신들이 선을 행하면 그 선의 공로로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 역시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이야말로 유일하게 구원을 얻는 자임을 자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행함도 구원에 도움이 되는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과연 인간의 전적 무능력에 대해서 누가 순순히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인간이 행하는 그 어떤 것도 선이 될 수 없다는 선언에 대해서 누가 과연 '아멘'하고 응답을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인간의 무능력을 말하고, 대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합니다. 구원에 있어서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의가 되시는 분이기에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행함으로 천국 간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것을 아무나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인간에게 선의 가능성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성령이 임하면 행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철저하게 성령이 행하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되어진 일이기에 내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공로로 주님의 공로로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세상에 대해서는 비밀이신 분입니다. 그 분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바로 성령이 함께 하셔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것은 성령의 지혜이지 우리의 지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성령이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1-2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위와 공로의 결과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쪽에서 하나님에게 어떤 선한 것을 보임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화평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은혜에 굳게 설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죄에서 해방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매여서 사망에 처해질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옛본성이 우리를 죄악으로 끌고간다고 해도 우리를 붙드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새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죄가운데서 날마다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6:1-2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합니다. 즉 옛본성은 죄가운데 사는 것을 즐거워했지만 새생명을 얻은 신자는 죄가운데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거부하고 멀어지기 위해서 힘쓰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생명의 능력인 것입니다.

신자라면 돈을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서 마음놓고 바라보겠습니까? 8: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 자입니다. 즉 성령이 함께 한 자이기 때문에 성령의 마음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8: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이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함께 한 신자라면 결코 죄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자신에게 죄가 보여질 때 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당연하게 여기고 죄를 기뻐하는 신자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자임을 깊이 자각하게 되고 다시금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로마서가 이것으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내 공로가 아닙니다'라는 말 몇 마디가 신앙의 전부가 되버릴 것입니다. 성경에 맞는 고백을 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한 자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한 개인의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교회로 끝난다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12: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이 말씀이 곧 교회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의 시작입니다.

교회란 각자 자기 몸을 가지고 모이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쳐진 몸으로 모여지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가 어떠함을 알기에 이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지는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신자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은혜를 말한다고 해도 여전히 내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 은혜를 참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에게 드려진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에게 무엇이 주어져 있든 그것으로 타인과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으로 서로 지체된 자로 모이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은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 모였을 때 증거 되어질 수밖에 없는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대접하기를 힘쓰고 핍박하는 자를 오히려 축복하고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 지을 지고 용납하는 관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 모든 모습들이 바로 은혜 아래 있다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성도 안에서 성도를 다스리는 복음의 능력이며 새생명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교회란 은혜 아래 있는 모임입니다. 은혜로 유지되는 것이 교회이지 인간의 재주나 돈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돈이 없으면 목사의 생활에 곤란을 가져올 것이고 예배당을 마련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교회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돈이 유지하는 것이 아니니까 교회에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교회에 돈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그 돈을 주실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신자라면 내 소유의 돈을 아끼기 위해서 교회의 필요에 눈을 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은혜가 생명이며 돈이 생명이 아님을 알기에 교회가 돈이 필요할 때 스스로 손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은혜가 유지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계속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마치면서 우리 다시 한번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서 점검을 해봅시다.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십니까?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십니까?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은혜가 여러분이 대하는 형제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되고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아는 여러분에게서 형제에 대한 미움이 나오고 욕이 나오고 시기가 나오고 경쟁이 나온다면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신다면 은혜를 나누는 관계로 모여져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아신다면 그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모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서 무엇이 보여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머물러 살아가기를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로마서라는 비밀의 계시가 여러분에게 전파되어진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