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남을 판단하게 되는 것은 선과 악의 시선으로 행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즉 행위를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로 구분 지어 놓고 보기 때문에 소위 선한 행위를 한 자가 악한 행위를 한 자를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욥과 욥의 세친구의 대화의 기준도 결국은 선과 악이었습니다. 재앙을 받은 욥을 향해서 '네가 죄를 지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욥의 친구들이나 '내가 언제 악을 행했던가'라고 말하는 욥이나 이들은 똑같이 선과 악이 기준으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은 행하고 악은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고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악을 행하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이 생각이 결국 인간을 판단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일을 했다'라는 생각이 자신에게 굳어질 때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선의 기준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행위가 선의 기준으로 굳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남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말씀드리기를 인간은 예배를 드려도 죄인이고 십일조를 해도 죄인이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해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행위가 선의 기준이 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하루에 성경을 5장은 봐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곧 선이 되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5장을 보지 못한 것은 악으로 규정됩니다. 교회가 일년에 5명을 전도하자고 목표를 세웠다면 5명을 전도한 사람은 교회에서 의인이 되지만 전도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없는 악한 신자로 전락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판단 자체가 악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간이 선악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이미 악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악을 기준으로 행위를 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는 악한 일을 한 사람과 선한 일을 한 사람을 구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롬 1:18-21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 모든 자에게 내려지는 진노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은 창조된 인간의 원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잃어버렸을 때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신이 왕이 된 채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진노하신다면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진노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원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진노의 기준이 되어서 우리를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이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해서 진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선이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만한 영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라면 우리가 드러낼 선이 무엇이며, 드러낼 선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도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많이 강조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신자되고 회개해야 구원받는 것처럼 강조하다 보니까 결국 회개하는 것이 선의 기준으로 존재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자연히 악에 속한 것이 되고 회개한 사람은 선에 속한 사람으로 판단 되어버리기 때문에 고의적으로라도 회개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회개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모습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절에서는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죄인이 회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회개로 인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회개하고 싶어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싶어서 회개해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회개한 것은 다만 인간의 뉘우침이고 종교적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아는 신자라면 회개를 하고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인도하셨음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자신의 공로로 앞세워서 자신의 회개를 선의 기준으로 삼아버리고 회개치 않은 자들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나를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를 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인도하신 결과이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남이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판단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회개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삼아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만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한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내세웁니다. 창조된 원래 인간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선악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선을 높이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이것은 선한 행동이다'라고 생각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 고집이 버려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그 고집을 두고 살 때 여러분에 의해서 누군가가 판단되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판단이란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나 또한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는 죄인인데 내가 누구를 판단하겠습니까? 이런 마음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인간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보겠다는 것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하고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것은 '나에게는 의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과 너무 다른 죄인이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행함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신 행함은 인간의 손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탄식해야 했던 것입니다. 행함이란 예수님을 통해서 완벽하게 보여졌습니다. 우리가 드러낼 수 없는 모습들이 주님을 통해서 완벽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를 버려야 합니다. 주님으로만 감사할 때 그것만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심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