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을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행위는 오늘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에서 전혀 벗어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서에서 나오는 신의 노여움은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해야 야단맞는다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벌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상의 기준은 칭찬 받을 행동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바울이 말하는 상벌이란 우리의 기준을 벗어난 채 주어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고 전혀 엉뚱한 데서 그 기준이 돌출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생각한대로 하나님의 상벌이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면, 필연코 하나님의 상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인간은 날 때부터 그 마음에 계획한 바가 악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인간은 상을 받을 만한 선한 행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 반면에, 하나님 편에서는 그 어떤 행동도 선한 것이 되지 못하니까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려는 시도를 버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인간의 생각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너는 무엇을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아느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세상 상식에서 생각해 버린 교회들이 구원은 은혜라고 가르치면서도 상을 얻기 위해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이고 상은 행함이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상이 각각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함이 같이 어우러져서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의 주장을 반박하기 딱 좋은 구절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는 이 말씀은 행함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내세우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고전 3:8의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는 말씀 또한 좋은 이용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고 했으니까 우리의 행위가 잘못되면 그에 따른 마땅한 보응을 받을 것이고, 행위가 옳으면 역시 그에 따른 마땅한 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1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는 구절은 분명히 6절과는 서로 상반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6절의 말씀이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그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한다면 11절에서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외모'란 잘생기고 못생긴 얼굴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천국과 지옥으로 구별하시는 분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상도 주고 벌도 주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6절은 어떤 의미의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선한 행위가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론은 '없다'이기 때문에 결국 6절 말씀에 근거해서 모든 인간은 멸망에 빠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한 대로 보응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면 우린 당장 죽어서 지옥에 가야할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천국을 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행한 대로 보응 하시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1: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26절에서도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다고 말씀하고, 28절에서도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신 인간의 상태는 모두가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각기 제멋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어버려 둔 인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 스스로의 깨달음이 아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4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라고 말합니다. 내어버려 둔 인간들 가운데 회개라는 것을 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를 찾아 나오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는 고백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자신의 잘못된 것을 뉘우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뉘우침으로 회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회개를 자기의 것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회개했다'고 생각하니까 회개한 자신에 대해서 의를 가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어버려 두신 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종교를 만들고 하나님을 만들어서 종교놀이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회개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신 결과라고 4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어 버려 두신 자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자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자들은 자신이 어떤 운명 속에서 무엇을 근거로 해서 빠져나왔는가를 밝히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만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7-10절까지에서 말하고 있는 선과 악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7,8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10절에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인간을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하듯이 하나님도 역시 인간을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선한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악한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하는 선과 악은 윤리와 도덕이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구분하십니다. 세상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윤리라는 틀에 합당한 사람이면 선한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선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선한 자가 되었다가 아니라 선하신 예수님 안에서 선한 자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절에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즉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 다른 말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선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버려진 인생에게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도함 받아 자신의 죄를 아는 회개에 이른 자들에게서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것, 세상의 것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노와 분으로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일이란 예수님 안에서 남을 도와주고 착한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만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쓸데없는 일에 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주님이 오시면 세상은 끝나는 것이니까 그때까지 나그네로서 부족한 것이 있고, 남들보다 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래의 영생의 나라를 바라봄으로서 미련을 떨쳐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율법을 잘지키고 교회를 잘 다니는 종교 행위를 통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구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헬라인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로 살아서 구원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로 산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택함 받은 자로서 주님 안으로 부름 받은 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서 세상이 아닌 영광과 존귀와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더욱 추구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발견되어진다면 그것은 저주 아래 있던 나를 택하셔서 믿음을 더해주신 결과임을 알고 감사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