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는 사람들은 선악을 행위를 통해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분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증명하는 말씀이 11절의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는 말씀인데, 이는 인간의 외형적인 조건들, 다시 말해서 눈에 드러난 행동이나 도덕과 윤리적인 모습들이 하나님이 인간을 취하는데 있어서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위에 선이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정죄를 받는다는 말씀을 하는 것도, 인간에게는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행위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꾸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믿음에 자신감을 가지려고 합니다. 인간 스스로 선의 기준을 세우고, 선을 실천함으로서 인간 되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법을 실천한 깃에만 관심을 두고 실천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법을 주신 것은 법을 실천함으로써 인간다워지라는 의도로 주신 것이 아니라 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죄인된 자신을 발견하라는 의도로 법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고 도덕법으로서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불완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는 지킬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대한 법을 지키는 자로 살아라고 이룰 수 없는 법을 주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이 완전히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면 될 것인데 끝까지 그러한 고백은 하지 않고 '최대한 지키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존심이고 고집입니다. 죽어도 자신을 죄인으로 전락시키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10가지의 법이 있는데 9가지를 지킬 가능성이 있으면 그 가능성에 매달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킬 수 없는 것이 보여질 때는 '인간이니까'하면서 지나쳐 버립니다.
인간이니까 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법을 지키지 못하는 나는 죄인입니다. 멸망에 빠져야 할 벌레만도 못한 자가 바로 나입니다'라는 고백이 왜 나오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지켜볼 만한 것에 기대를 거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신 의도는 우리에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기대하고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도덕법이라는 것은 성경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을 포기할 수 없는 법적인 인간이 끝까지 법을 붙들기 위해서 붙여 놓은 명칭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히 7:18절에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라는 말씀이나 골 2:16,17의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는 말씀은 다만 율법의 표면적인 부분의 폐지를 말하는 것이지 모두가 폐기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는 말씀이나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는 말씀을 앞세워서 십계명은 도덕법으로서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고 강변합니다. 또한 롬 3:31절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는 말씀을 동원해서 사도들도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결국 끝까지 법대로 하자는 고집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십계명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체가 곧 십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또 세상에서 사셨던 모든 것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자는 것이지 계명을 지키자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명의 모습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성령의 일하심을 따라 자연히 보여지는 것이지 실천할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13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도 역시 율법은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실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 버립니다. 율법을 행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야고보서 2:10절에서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모두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한 하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13절의 말씀도 인간 가운데 의인은 없다는 것을 율법이 증명해 준다는 의도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적인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실천한 부분만 앞세우기 때문에 결국 이런 인간이 천국에 가면 '나는 율법을 잘 지켜서 천국에 왔다'고 자랑할 것이 뻔합니다. 이런 곳이 천국이겠습니까? 그러면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율법을 통해서 죄인 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면 율법을 받지 않은 인간은 무엇을 가지고 죄인 됨을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이 14,15절의 말씀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역할을 하는 것은 자기 양심입니다. 양심이 곧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양심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비록 '나는 지금까지 양심대로 살았다'라고 큰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간은 양심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TV를 보면서 가난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봤다고 했을 때, 인간의 내면에서 외치는 양심은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에 순종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다. 도와줘도 양심에 가책이 되지 않을 만큼,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만큼 도와주면서 양심의 요구를 지켜보려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을 받은 인간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려고 함으로서 자신을 가려보려는 것이나 어느 정도 양심대로 삶으로서 자신을 가려보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법으로 살거나 양심으로 살거나 둘 다 동일한 것은 자신이 죄인 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16절의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 살 수 있는 것이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법을 지킴으로서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는 이상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 법을 실천하는 것이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고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신자들을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실천을 통해서 천국 가보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실천을 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실천을 못했다고 해도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나 피로서 주어지는 의에는 전혀 손상이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을 못한다고 해서 불안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천을 의로 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불안해한다면 결국 자기 실천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저주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 저주를 짊어진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즉 예수님은 저주의 자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주의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을 저주의 자리가 아닌 의의 자리에 세우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내가 저주의 자리에 서 있을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만 내어놓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