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2:17-24 스승

목사로서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교인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즉 목사는 스승이고 평신도는 목사에게 배우는 입장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목사는 자연히 교인들의 위에 자리하려고 하게 되고 교인들은 배운다는 입장 때문에 항상 목사로부터 행동에 대한 지침을 하달 받는 식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친다'고 할 때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 즉 스승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완벽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도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목사도 인간인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는가?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목사를 변호하기도 합니다. 물론입니다. 목사도 인간입니다. 목사도 인간이라는 것은 목사 역시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인입니다. 다만 그것을 안다면 목사 역시 교인들과 똑같이 죄인의 입장에서 말씀을 전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도 인간이라고 하면서도 교인들보다는 높은 위치에 자리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죄인됨을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서 더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냥 죄인이라고만 하지 죄가 많은 사람, 죄가 적은 사람으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목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다만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즉 목사의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교인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가르치십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참 스승이요 신앙의 아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께 배우고 있는 것이지 목사에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성경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한 것도 뺀 것도 없이 그대로 전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를 책망해도 말씀이 해야 하고, 우리를 판단해도 말씀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계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목사가 말씀을 이용해서 교인들을 책망하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말씀에 벗어난 자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벗어나 있는 교인을 말씀을 이용해서 꼼짝 못하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주님이 다스리는 주님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자신의 왕국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스린다'는 말은 자주 쓰면서도 그 말을 체험적으로 느끼지를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 땅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다스림을 받으려면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실체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신해서 자신들을 다스릴 자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사입니다.

그러나 몸이 없어도 얼마든지 우리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종이란 그 실체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복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인 성경이 있는 이상 우린 분명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를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고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자라고 하면서 일반 신자와 구별하고 교회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서 인간의 다스림에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목사는 결코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0절부터 보면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훈도요 스승이요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는 말씀인데 그 뜻은 '네가 선생이냐? 그런데 왜 선생이라고 하면서 네가 가르치는 바를 네 자신에게는 가르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가르치라는 것은 네가 말한 것은 너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 선생된 너도 도적질을 하지 말아야 하고 간음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 너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적질을 해놓고는 도적질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간음을 하면서 간음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결코 선생이 아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승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그러면 나는 도적질도 안하고 간음도 안했으니까 스승이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단지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느냐는 행동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바라보고 탐심을 가지지 않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냐? 인간은 말씀대로 살 수 없고 지킬 수도 없으니까 잘못된 것을 봐도 아무 소리 못하고 그냥 지나쳐라는 말이냐?'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는 말씀은 남이 잘못했을 때 지적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 우리를 누가 다스리고 있느냐는 차원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의 잘못된 점도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함께 다스림을 받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다는 것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나 힘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는 인간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율법이 주어지자 그 율법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정복하고자 해버립니다. 즉 율법을 지켜보겠다는 쪽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법을 지킴으로서 자기의 의를 보이기에 힘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의 신앙은 신앙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멸시를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을 향해서 도적질을 하면서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치느냐고 공격한 것은, 그들을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 다함께 죄인의 자리로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의도였습니다. 바울은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자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자이고 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한 사람이 있고 덜 잘한 사람이 있는 구분으로 모여지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이에서도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말할 때 흔히 하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다 아시고 율법을 주셨다. 때문에 하나님은 다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을 요구하시지 율법을 다 지키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인간은 죄인이고 악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여겼고, 자신들도 얼마든지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무능함을 발각시키는 율법을 주신 것인데, 인간은 그것을 행동으로 보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너희는 모두가 못난 자이니까 너희들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인간의 선도 자랑하지 말고 선으로 경쟁하지도 말고 모두가 못난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자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목사가 '자랑하지 않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자랑하지 마세요'라고 가르쳤다고 할 때, 과연 자랑이라는 것이 안하겠다고 해서 안해지는 것입니까? 자랑이란 자랑할 것이 없을 때 안하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인간은 남이 자랑을 하면 지지 않으려고 없는 자랑거리까지 만들어 내서 자랑해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간이 스스로 자랑을 그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자랑을 안하게 되어지는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잘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간이다'는 것을 알게 될 때입니다. 그 역할을 율법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입다물 것을 요구합니다. 선한 것처럼 보인 행동을 가지고 잘난 척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나 나나 다같이 못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했느냐 못했느냐라는 법의 다스림에 살지 말고 주님의 다스림에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하신 용서에 기뻐하고 주님께만 영광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내가 못한다고 불안해하고 조급해 하는 것은 다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깨달음은 여러분을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