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2:23-29 이면적 유대인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자기 발전'이라는 욕망에 의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후손은 자기 발전이라는 욕구를 지닌 채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나아지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혹시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내일 다시 나아질 것을 기대하면서 '일어서자'고 외치는 인간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자기 발전이라는 목표가 없다면 살아갈 소망도 일을 해야할 이유도 다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어느 한군데라도 '발전'을 목표로 내세우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좀 더 나아지기 위해서 열심을 내라고 합니다. 지금 고생이 되더라도 내일의 발전을 꿈꾸며 이겨나가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발전이 없다는 것은 죄악이며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자기 발전은 종교안에까지 교묘하게 파고 들어옵니다. 불교에서 고행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것은 결국 오늘보다 나은 인간되는 것이 아닙니까? 유교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도 역시 보다 나은 인간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기독교 역시 인간의 종교성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자기 발전이 존재합니다. 자기 발전의 욕구는 신학과 교리라는 옷으로 위장을 한 채 교회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한 예로 조직신학이라고 가르치는 성화 교리를 들 수 있습니다. 성화란 한마디로 말해서 좀 더 나은 인간되는 것입니다. 불교가 도를 깨달아서 성불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 같이 성화된 인간, 즉 믿기 전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식의 성적이 올라가면 부모가 기뻐하듯이 하나님도 역시 신자가 좀 더 나아지면 기뻐하실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화를 강조하게 되고 교인들은 성화하기 위해서 노력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발전이 없는 것은 무능한 것이고 죄악이 되는 것 같이 교회 안에서도 역시 발전이 없는 교인을 신앙의 무능력자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서 좀 더 나아진 모습을 보기 원하게 되고, 나아졌다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천을 위해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의 기준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의식의 율법은 폐지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유독 십계명은 도덕법으로 분류하여 계속해서 남겨 놓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한 인간으로 나아지기를 욕구 하는 본능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도덕적 인간되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도덕을 통해서 발전된 자기 모습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도덕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을 때 그속에서 도덕의 냄새를 맡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도덕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을 방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도저히 상식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법이라는 명분 아래 여전히 십계명에 의해서 살아가는 신자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것이 사도 바울에 의해서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습니다. 롬 2장도 역시 그에 대한 말씀입니다.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는 율법을 실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그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영생은 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율법 외에 한 의, 즉 하나님의 의를 보내시고 그 의만 믿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인간은 모두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채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온갖 합당치 못한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도덕과 윤리라는 것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수기 위해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도덕과 윤리로 위장되어 있는 인간은 자신의 의가 보이기 때문에 하늘의 의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따로 의가 오지 않더라도 자기의 착함과 선으로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잘못임을 나타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모든 의를 포기하고 하늘에서 나타난 한 의를 의지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그 율법을 맡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당연히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하늘의 의를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이것이 선민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선민이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살아가는 자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해 버리고 율법을 통해서 자기 발전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23절의 말씀 같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24절의 말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요 5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 드러내고 예수님만 높이고 있다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성경을 보는 신자로서 가장 합당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자 해버린다면 과연 예수님이 높아지겠습니까? 예수님을 높이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마음에 두며 그 일을 찬양하는 것만이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자기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십자가를 찬양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를 오직 십자가를 찬양하는 자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라면 결국 성경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임을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율법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할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례는 율법과 함께 유대인의 자존심이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선민이다는 표시였기 때문에 할례가 없는 이방인을 무시하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25절에서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유대인들은 몸에 할례를 한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바울은 만일 너희가 율법을 지킨다면 할례 역시 유익하겠지만, 그러나 율법을 하나라도 범한다면 그 할례는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범하면서 할례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누가 과연 진정한 유대인인가?'를 확실하게 규정합니다. 진정한 유대인은 이면적 유대인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신앙은 민족성과 전통 역사 등과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여기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할례와 함께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으로서 인간의 생산 기능을 부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손은 인간의 생산 기능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낳고 할례를 행한 것은 '이 아들은 우리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할례가 이스라엘 안에 이어져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인간의 핏줄로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유지되는 특이한 나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할례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례의 정신, 즉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사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정신이 빠져 버린다면 아무리 할례를 행한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그들은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면적 유대인, 즉 마음에 할례의 정신을 담고 사는 자가 진정한 유대인이며 할례는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 진정한 할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할례란 인간의 힘과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 되어진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뜻으로 할례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할례를 했던 것입니다. 할례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 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성령 받고 거듭난 자 되는 것을 율법을 지키고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자질이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사고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가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이듯, 거듭남 역시 인간의 본질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죽은 자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런 인간이 스스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설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마음에 할례를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거듭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오직 주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의 마음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신앙적 자기 발전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길로 끌고 갈 뿐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은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까?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신앙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욕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단지 예수님만 높이면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음을 높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이면적 유대인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