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8 유대인의 나음

우리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이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사실 미국의 기독교는 많은 부분이 실용주의에 의한 기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용주의란 '어느 것이 나에게 유용하게 쓰이느냐?'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에게 유용하면 진리이고 유용하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고 판단을 해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결혼 생활에서도 서로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을 해야 아내로 보고 남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하시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일단 하나님이 있다고 믿고 살면서 자신의 생활이 나아지면 하나님은 진짜 있다는 것이 되고, 만약 자신의 생활이 나아진 것도 없고 아무 유익도 없다고 생각되면 하나님도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에 만연되어 있는 '실용주의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이런 실용주의 기독교가 한국에도 만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유익이 되느냐에 관심을 둡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보다는 교회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이 되는 교회는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아주 좋은 교회가 되고 별 도움도 유익도 되지 못하는 교회는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교회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무엇을 해도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느냐?'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용주의'입니다.

유익이 있는 것이 진리라고 판단해 버릴 때 결국 참된 빛으로 오시고 진리로 오신 예수님을 또 다시 죽이는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삶의 유익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유익을 육적인 것이나 외형적인 것에 두지 않고 다만 '예수님을 알고 십자가를 알게 되어진 것'에만 둔다면 그 사람은 바른 유익으로 진리를 판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 외형적인 것에 유익의 초점을 맞춘다면 그 사람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진리로 보지 않게 되고 진리 아닌 것을 진리라고 우기는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유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대로 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거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외친다고 해도 그 복음이 교회에 외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할 때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으로 취급받고 맙니다.

오늘 본문 역시 여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의가 되는 것도 강조했습니다. 또 지난 시간에는 율법을 지킨다고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를 했다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 즉 유월절 정신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이 진짜 유대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1절에서와 같이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라고 반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복음을 말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반문까지 미리 언급하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전에 율법을 주장했었고 율법을 통해서 구원 얻는다는 생각에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 주어지는 의를 부정해 버릴 때 그런 반대 질문이 충분히 있을 수 있음에 대해서 예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기도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을 때 '그러면 기도를 하지 말란 말이냐?'라는 공격을 미리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지키려고 했고 실천하고 고집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유익을 다 무너뜨려 버리기 때문에 '그러면 유대인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할례를 하라는 언약이 주어진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유대인으로서 다른 민족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단 말이냐'는 반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반문을 미리 끄집어 낸 바울은 그에 대한 답으로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2절)고 합니다. 첫째라고 말한 것은 둘째 셋째 계속해서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1:8절에서도 첫째라는 문구를 썼지만 그 첫째는 둘째가 없는 첫째입니다. 본문 역시 둘째가 없는 첫째를 말합니다. 이것은 오직 이것 하나다는 의미입니다. 즉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 나은 것, 할례를 했을 때의 유익된 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말씀을 맡긴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맡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율법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씀의 정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말씀을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았으니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 인간은 스스로 법을 지켜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구원받는 존재임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할례를 하면서도 우리는 할례한 거룩한 종족이다는 자부심을 가져라는 것이 아니라, 우린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나음이고 유익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정신은 보이겠다고 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런 나음을 외면해 버리고 외적인 나음, 즉 유대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교만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할례의 유익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는 유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선민이라는 흔적을 가지게 된 것을 유익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할례를 한 그 흔적이 천국 가는 증표쯤 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씀이 세상에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미쁘심을 세우려 하심이요(3절), 하나님의 참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이요(4절),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5절).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의도가 이스라엘의 실패로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인간의 거짓됨과 불의함 등을 드러냄으로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참되심과 의를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거짓이 드러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참되심이 증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불의가 드러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 즉 율법은 인간의 거짓됨과 불의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거짓됨과 불의함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다는 것이 그들의 나음이고 유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또 한가지의 반박을 예상 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면 인간의 거짓과 불의함이 하나님의 참되심과 의로움을 증명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6,7절). 또는 하나님의 의로움과 참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범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는 것입니다(8절).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그럴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러한 생각은 정죄를 받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죄인입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자신이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 죄인임을 알 수 있는 유익을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나은 점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역시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유익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말씀의 유익은 나의 죄인 됨을 알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인식이 있을 때입니다. 즉 자기를 발견했을 때가 최고로 나은 인간이 된 순간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유익입니다. 헛된 것에 나음과 유익의 모습을 헛된 것에 두지 마시고 자기 발견에 두시기 바랍니다. 자기 발견이 십자가에 최대로 가까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