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9-20 입을 막음

지난 시간에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고, 의인도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착하다, 또는 의롭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지구상에 숨을 쉬고 살아가는 그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와 선을 자랑할 입을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인간에게서는 결코 선한 행동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을 하면 입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오직 성경입니다. 신자는 비록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 '아니라'고 하면 그 즉시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신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자신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믿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철저하게 자기라는 틀에 둘러 싸여서 자기 고집과 아집으로 멸망을 향해서 돌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대해서 감사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을 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섭섭함을 느끼고 반발을 한다는 것은, 결국 '나도 얼마든지 착한 행동을 하고 의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나를 무시한다'는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2:12절에 보면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율법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그토록 붙들고 의지하는 율법을 가지고 대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인간을 대할 때 과연 살아남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나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나온 인간은 '선한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조건은 완벽입니다. 선을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고, 가끔 기분 좋을 때 행하는 정도도 아니며 완벽한 선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하면 심판해 버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양심과 믿음을 믿고 끝까지 선한 행동으로 버텨보겠습니까? 과연 어느 것이 생명에 이르는 길인가를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에 순종하시겠다면,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입에서는 행해야 하고 실천해야 하고 지켜야 한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입에서만 나오지 않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에서 아예 지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날 때부터 선악을 아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선악에 대한 지식이 지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 선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진단은 정확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선악지식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믿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의 인간에게 딱 하나 금했던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왜 하나님은 유독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을 금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는데, 인간에게서 생명나무를 빼앗아 버릴 정도로 싫어하셨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선악에 대해서 백지 상태라는 것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선택해 버리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선한 것이니까 이렇게 하고, 저것은 악한 것이니까 하지 말자'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자신의 선악 기준에 따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한 행동이 거듭될수록 선이 쌓이게 되고, 결국 선이 근거가 되어서 자신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기준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고 있는 인간은 자꾸 자신이 쌓은 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쌓은 선 덕분에 이만큼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악을 알고 있는 인간입니다. 결국 생명은 오직 은혜를 아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인데, 은혜의 방식이 아니라 선악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인간에게 생명이란 가당치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인간에게는 생명을 줘봐야 결국 은혜가 아니라 '내가 착하니까 생명을 누리게 하셨다'는 말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을 싫어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직 은혜를 아는 자만 생명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의 법칙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선언은 인간에게서는 그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의 조건이 될만한 것은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 인간에게 법을 말하고 있는 그 의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입을 막아 버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입을 막는다는 것은 할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소위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은 모두 다 심판으로 밀어 붙여 버리는 것이 율법이 말하는 바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구제를 함으로서 믿음 있음을 확인하려고 하고, 봉사하고 헌금함으로서 '역시 나는 믿음이 있는 자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에 의해서 증명되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을 인간의 행동으로 증명하고 보여줄 수 있다면, 애당초 인간에게는 믿음을 만들어 낼 자질도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믿음은 인간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믿음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믿음이 무엇이고, 그 믿음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믿음 없는 인간을 선택해서 믿음을 나타내게 하심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인간이 뛰어 들어서 '내가 해보겠다'고 설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성령을 할 일 없게 만들고, 주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악기준에서 나온 인간의 행위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혹 여러분 가운데는 '목사님 저는 제 행동을 절대로 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제 행동이 구원에 조건이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고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신자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문을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분석해 보면, 일단 이 사람은 신자다운 행동과 신자답지 못한 행동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인격적인 모습과도 연결될 것이고, 성격적인 것과도 연결될 것이고, 윤리와 도덕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인간의 인격이나 성격 행동 등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고, 결국 의로운 행동과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자신의 입으로는 행동을 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미 신자다운 행동, 즉 의로운 행동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행동에 의의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는 많은 신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 '누가 그것을 모르나? 나는 내가 선한 행동을 해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면서도 결국 신자다운 행동을 따로 구분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선한 행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사고방식에서 튀어나오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신자다운 행동을 따로 구분하고 있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신자다운 행동이 없는 사람은 분명 믿음이 없다고 단정할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신자다운 행동을 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분명히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선언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우리를 선에 대해서만큼은 할말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로지 우리 속에 감추어진 죄를 끄집어내면서 소위 '나 잘났다'는 과시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 앞에서 입을 열고 큰소리치는 자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해 버리실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모든 인간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하고 심판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를 보여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이기 위한 기회이고 도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