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라는 단어 안에는 '행함'이라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행함이 요구되지 않는 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법은 장식물이 아닙니다. 인간 앞에서 폼만 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어긴 자는 가차없이 붙들어다가 징벌하는 것이 법의 위력입니다. 따라서 법을 어긴 자는 법 앞에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3:13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뭔가 빠져나갈 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율법을 듣고 율법을 말한다는 것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을 주장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율법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성경에 분명히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목사가 교인들에게 왜 하라는 가르침을 하지 않느냐?'고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목사님은 탐내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가 대답하기를 '실천할 수는 없지만 교인들에게 탐내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목사가 할 일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이유는 뭔가?'라고 물었더니 '인간이 실천할 수 없으니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되지 않느냐?'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받아서 제가 말하기를 '예,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저는 교인들에게 뭘 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라고 가르칩니다'라고 했더니 저에게 하는 말이 '이단처럼 말이 고단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교인에게 하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보니까 이단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에게 제가 말하기를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으니까 그리스도만 전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하자 '그런 말은 이단들이 쓰는 말이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가 이단이 아니라 목사님이 이단이다'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목사님'이라고 불렀는지 후회가 막급합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탐내지 마라' '미워하지 마라' '주일을 지켜라'는 것을 가르친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율법은 행함을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자는 분명히 심판해 버리겠다는 것이 율법의 의지입니다. '나는 율법을 말하고 지키라고 가르치니까 율법을 인정하고 믿는 자다'는 것은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저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고 행함과 실천을 가르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긍휼이 아니라 율법으로 심판을 받겠다고 나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룰 수 있는 의가 보여진다면 저는 주저 없이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자존심 상하게 '나는 무능합니다'라는 고백을 해가면서 예수를 의지하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볼 때 여러분에게서는 율법의 요구를 완벽히 충족할 자질이나 의가 전혀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인류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20절에서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아무리 선한 일로 여겨진다고 해도 여러분의 행위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십시오. 왜냐하면 그래야 진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천국으로 보내주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선을 행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도 버리십시오. 그 생각이 여러분을 지배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을 바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에는 보답할 수 없는데, 도대체 뭘 해서 보답하겠다는 것입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행함을 요구하고, 행함이 없는 자는 심판하겠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율법 앞에서는 그 누구도 희망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행함을 기대하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 인간은 전혀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기를 원하셔서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동시에 양쪽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한쪽을 바라보기 위해서 다른 한쪽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하늘의 의와 우리의 의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인간은 날 때부터 자신의 의를 믿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포기하고 하늘의 의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즉 완벽한 행함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서 기가 죽고 자기 의를 포기하고 겸손히 하늘의 의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율법의 의가 있고 또 다시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도저히 의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공짜로 하늘에서 의를 주입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말에 펄쩍 뛰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한 의가 주어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 의를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의 의를 포기할 때 가능합니다.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나의 의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한 의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내 의가 한 의를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내 행동이 의가 되어서 내 눈앞에서 아물거리기 때문에 한 의만 내세우고 한 의만 의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의와 한 의를 적당히 섞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서로 합력해서 구원받는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인간이 지옥으로 가게 된다면 죄를 지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의가 없기 때문에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인으로 죽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죄인이고 기도를 해도 죄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한 의가 주어져서 그 의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그 의를 의지하고 바라보자는 것인데, 이 말이 왜 그렇게 싫은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존심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부터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까?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모두가 아닙니다. 만약 십일조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결국 십일조를 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행동이라면 분명 그 행동으로 구원받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의인이 없어서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의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분명히 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는 내가 만들어 내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의입니다. 그 의를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여기서 인간의 행함이 필요합니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고 그 의만 생명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믿게 하신 모든 자에게 주어집니다. 아무 차별이 없이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에 의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의가 여러분에게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이 전도인가를 알고 전도를 하게 될 것이고, 무엇이 기도인가를 알고 기도를 하게 될 것이고, 무엇이 십일조인가를 알고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은 한 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도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의를 바라보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 외에 한 의에만 소망을 두십시오. 생명은 바로 그 사람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