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23-26 피

예수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었으면 믿는 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었으면 뭘 할까?'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만큼은 졸업했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 다음에는 뭘 할까라는 발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더 자라지 못하는 것이고, 결국 있는 믿음조차도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미가서 6:6-8절에 보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나같이 믿음과 정성으로 드리면 하나님은 분명히 받으신다'는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자기 행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아담의 죄속에 태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의 죄속에서 태어난 자라면 그 마음은 이미 악으로 더러워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 인간이 그 어떤 멋있게 보이는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더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신의 멋있는 행위를 통해서 더러움과 악함을 가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악으로 더러워진 인간은 이미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보다는 원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나온 것이 천천의 숫양이라 할지라도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라고 할지라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것은 오직 공의와 사랑과,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정성을 가지고 바친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자신의 봉사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진심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하나님에 세상에 주신 공의와 사랑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생각할 때 가장 의롭다고 생각되는 나의 행위보다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더 귀한 줄로 여기고 높이는 인간된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공의와 사랑과 겸손이 나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느 인간이라도 공의와 사랑과 겸손은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나타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행위를 높이고 귀하게 여기며 자기 것만을 내세우고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의를 얻어보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가망 없는 존재이고,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마른 뼈다귀에 지나지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은 율법 외에 한 의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의를 행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다면 그 누구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의,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이것을 아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화목제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제물로 자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 인간의 성의 있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보겠다고 설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서 한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만 마음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는 것도 '네가 예수 믿고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네게 해 준 일을 믿느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화목제물 되셔서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그 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있어야 할 것은 주님의 이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내가 산 자가 되었음을 믿는다면, 내 행위보다는 주님만 높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의에 비교해서 내 행위는 쓰레기 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내 행위를 내세우고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오히려 감추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의를 아는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뭘했다고 해도 주님의 피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 때 그 신자는 자연히 주님의 피만 높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장자를 죽이는 심판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은 오직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심판에서 살아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거나 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말씀대로 어린양의 피만 문설주에 발랐을 뿐입니다.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과연 저 피가 우리를 살릴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할 수 있지만, 피를 믿고 그 피를 바른 자들은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피로 인해서 한번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대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의 정신을 유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피 때문에 살아나고 피 때문에 존재하는 백성이 이스라엘이었다면, 오늘날 피 때문에 존재하는 자는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오직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피만 증거하고 그 피의 흔적을 나타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시시하게 바라봅니다. 내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이상 나에게는 더 이상 피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를 바라보게 되고, 자기의 행위를 더욱 돋보이게 위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화목제물되신 그리스도의 피가 유일한 영광입니다. 피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피를 귀하게 여기고 피만을 높이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들고 나오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이 법칙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엉뚱한 것을 가지고 영광을 돌리겠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피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피 안에서 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얻는 것이고, 피안에서 용서함을 받는 것이고, 피 안에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피를 가리고 막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사탄의 역사임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높이고 드러내는데 모든 관심을 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