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27-31 믿음과 행함

믿음과 행함의 문제가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오해와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믿음만 강조하자니 행함이 울고 행함을 강조하자니 믿음이 울기 때문에 믿음과 행함을 적당히 혼합해서 어느 한쪽에도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한다는 시각이 높습니다. 또 한쪽에서는 오직 믿음만을 주장하는 편을 향해서 '믿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라고 반박을 하면서 결국 믿음에는 인간의 행함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완벽한 '믿음만으로'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든 말든 어쨌든 인간 편에서 보여야 할 행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 역시 인간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발생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믿음'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행함을 완전히 짤라 버리지를 못합니다. 믿는 것을 인간의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행함을 붙이려니 '오직 믿음'을 말하기가 난처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함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실체입니다.

인간이 행함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는 인간의 행함에 의가 되는 행동과 의가 되지 못하는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가 되는 행동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의가 되는 행동을 해서 의 있는 신자가 되려고 하는 생각이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 있는 '행함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이란 용어의 의미는 행동하고 있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함에 의의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것임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즉 행함을 포기하란다고 해서 행동 자체를 금하라는 의미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목사님 의가 되지도 못한 행동을 뭐하러 합니까?'라고 반발을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 의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살았고, 자기 스스로 의를 이루어 보고자 하는 불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나오는 반발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고,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인간의 행함이 의가 된다는 선언이 없으며 또는 의가 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도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행함이 의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오해하기를 믿는 자가 의롭다고 하니까 믿음도 인간의 행함으로 오해를 하고 의가 되는 행함이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엡 2: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믿음은 분명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가 된 것인데, 이 믿음을 어떻게 인간의 행함으로 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의롭다는 칭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라면 감히 그 의를 자랑하고자 하겠습니까? 우리가 의를 위해서 한 것이 뭐가 있다고 자랑을 합니까? 자랑한다면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자랑할 뿐입니다. 그래서 고전 1:31절에서는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7,28절에서도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주의할 것은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전체에서 수없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마치 내가 의를 소유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의인되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인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주와 함께 의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의인되었으니까 의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의인의 행동을 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도 의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단지 믿음 안에서 의안에서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행함에 대해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행함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의가 되지 못하는 인간의 행함에서 어떻게 의의 모습을 확인하겠다는 것입니까? 내쪽에서 뭔가 행위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믿음이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믿음 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야를 죽이면서도 메시야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머리 속엔 전혀 다른 메시야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른 예수를 바라보는 인간들은 자기의 행위가 진짜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인 줄도 모른 채 행위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행위를 사랑하는 그 자체가 바로 예수님을 밀쳐내고 죽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행위를 사랑하는 자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고 있는 예수는 자신의 행위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상으로 보답해주는 예수 아닌 예수, 즉 다른 예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으로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은 절대로 인간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행위를 극도로 사랑했던 바리새인이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들입니다. '나는 내 행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자기 행위를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의로 여기는 행동을 하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마음 뿌듯해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가 못박혀야 할 장소에 대신 박혔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분을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인 그 분을 의지한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고 고개를 못들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습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나는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라는 생각으로 예수 앞에 나오면 떳떳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도 내가 믿어주는 것이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 선심 쓰듯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다'는 것을 알고 나온 자는 예수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죽인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는 말씀만이 마음을 칠 뿐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감사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과연 이러한 신자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의 행함을 내세우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은 31절의 말씀을 돌파구로서 들이댑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시지 않고 굳게 세우신다고 했으니까 인간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굳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율법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달아라고 주어졌습니다. 즉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행함을 통해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주어진 의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도, 율법이 주어지지 않는 유대인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이 드러났다면 그것은 율법이 의도한 바가 명백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29절에서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입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다는 것을 율법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기 때문에 율법을 받지 않는 이방인도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나오는 신자의 모습이 율법의 완성됨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 이해하시고 오직 믿음이라는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로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