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13-16 아브라함의 후사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늘로부터 복이 주어지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이란 인간이 잘한 것에 대한 대가로 또는 상으로 주는 것이지 잘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도 행위가 보태져야 온전한 믿음이고 믿음다운 믿음이지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보조를 받으면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차버리고 믿음 독단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행위가 없이 믿음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어지는데 믿음에다가 행위를 보태서 믿음을 더 믿음답게 만들어 보겠다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는 불신앙임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4장에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살펴봤습니다. 3:28절에서도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되어진다면 이시간부터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계산하고 신자다운 모습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할례와 전혀 상관없는 무할례시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행위를 보조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으로 되어지는 일임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떠나지 못하고 행위의 주위를 맴돌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뭔가 잘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겠지'라는 심보로 행위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복이든 상이든 그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와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복을 받고 상을 받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율법이지 않습니까?

15절을 보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고 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이 진노의 자식임을 몰랐고 내가 바로 멸망의 자식임을 몰랐는데 율법을 받고 보니까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전혀 어긋나 있는 멸망의 자식이라는 것이 발각이 된 것입니다. 그 일을 율법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이든 상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신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은혜로서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공짜라는 것은 대가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잘했으니까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상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상은 분명히 잘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상도 공짜로 주어진다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신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도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 15:1절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상급이다'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상으로서 다가오시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아브람이 잘한 행동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까? 이때는 할례를 행하기 전이고 이삭을 바치기도 전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무 행위도 없이 하나님이 상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상은 내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완벽한 행동은 예수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은 누구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상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 곧 이미 상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의 생명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입니까?

눅 23:41-43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한편 강도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 것은 자기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가 잘압니다. 강도는 자기를 알고 예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 행위는 이렇게 사형을 받아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죄도 없이 죽는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자신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런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그러면 도둑질을 해도 천국 간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을 합니다. 분명히 살인 강도라고 해도 천국 간다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끝까지 자기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을 했다 안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할 악한 죄인임을 아느냐?'가 문제입니다. 도둑질을 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도둑질을 안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살인을 했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고 살인을 안했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탐욕을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미움을 가지고 삽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도둑질을 한 자이고 살인한 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율법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자는 내가 뭘 했다 안했다를 따지지 않고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고백하면서 '나는 내 죄로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라면 주와 함께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고 할 때 그 믿음이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복을 내가 뭔가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즉 나를 구원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아브라함을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린 분명히 유대인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되어질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 후사라는 뜻입니다. 16절에서도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후손이란 조상을 닮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아브라함을 닮았다는 것이 바로 후사, 또는 조상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을 닮았다는 것은 신체나 얼굴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믿음의 모습이 곧 우리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진 믿음이 아닌 것은 모두가 거짓된 믿음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약속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인 것이고, 이러한 믿음이 있는 자가 곧 아브라함의 후사이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그 믿음이 있는 자가 곧 아브라함의 후사인데, 행위가 있어야 참된 믿음이고 행위가 있어야 진짜 신자라고 한다면 결국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은 헛것이고 약속 또한 폐하여지고 오직 인간의 행위만이 살아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논리가 되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사는 결코 자기 행위에 미련을 두는 자가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에 선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들고나올 깨끗한 행위가 없음을 알고 어떤 행위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후사가 아닙니다. 후사는 인간의 행위를 거부한 자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나는 진노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주님을 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놓는 것이 영원한 멸망임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