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17-25 믿음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땅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생산되어지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상식과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믿도록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땅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믿음이기 때문에 결국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믿음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때 '맞'다'고 하면서도 자기 힘으로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되니까 하늘에서 믿음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믿음이 주어진 후의 모습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믿음이 주어지면 그 믿음이 자기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해서 전에 행하지 못하던 것을 행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기도도 안하던 사람이 매일 새벽기도에다가 철야기도까지 하게 된다든지, 성경을 보기 싫어하던 사람이 갑자기 성경을 읽기 시작 하다든지, 봉사를 하게 된다던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게 된다는 등의 것들을 믿음이 주어진 결과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확인하고 또 드러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기를 마음먹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나는 믿음이 있다'고 위안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주어진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차근차근 생각해 봅시다. 믿음은 선물이라고 했고 선물이라는 것은 우리 힘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누구나 믿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확신을 말합니다. 자기의 힘을 계산해보고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없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주어진 믿음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기존의 내 믿음은 어떻게 됩니까? 같이 공존하고 서로 융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몰아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선물로 주어진 믿음이 그 속에 자리한 자는 기존의 자기 의지와 자기 확신 등 자신의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포기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받았으니까 난 할 수 있다라고 해버린다면, 결국 선물이라고 해놓고는 다시 기존의 자신의 믿음으로 되돌아가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수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믿음은 본명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하도록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을 로보트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도하도록 하고, 내가 성경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성경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듣기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주 애매모호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해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내 안에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신자니까 기도하자'가 아니라 '신자니까 기도하게 되어진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도, 기도하지 말아라가 아니라 기도를 해야 신자라는 생각에서 자신의 의지로 기도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동안 기도를 게을리 했다. 신자가 이래서 되겠는가? 오늘부터 하루 10분씩 기도하자'라는 결심을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과연 그속에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 있습니까? 이 사람은 단지 자신이 신자라는 모습을 기도를 통해서 위장하고자 할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하게 하는 것은, 내편에서 '하자'라는 계획을 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요구하는 것은 내가 포기되어지는 것인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고 자연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기도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같은 말입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을 믿었던 아브라함을 얘기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얘기가 4장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때 아무나 '내 믿음도 선물로 받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믿음 같지 않은 것은 내가 선물로 준 믿음이 아니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보고 내 믿음을 판단하지 못하고 아브라함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고 기대도 할 수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실현 가능성 0%인 확률에 자신을 맡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까? 결국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그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었던 그 현실은 무엇입니까? 19절에 보면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아브라함은 99세였고 사라는 90세였습니다. 이는 인간의 생식 기능이 이미 다 죽어버린 시점입니다. 생식기능이 죽은 가운데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미친 짓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번 믿어나 보자는 식이 아니었습니다. 요행을 바란 것이 아닙니다. 되어진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이나 아내의 생식기능이 다 죽어버린 것을 알면서도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믿음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믿음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17절). 이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에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이 개입될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은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행함을 갖다 붙이지 말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후사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십니까? 여러분을 죽은데서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하시는 하나님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죽음이 두렵지가 않아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24절에 보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죽어도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믿음에는 죽음이 아닌 생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믿음이라고 하고 있는 것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대조해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그만한 믿음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있다면 버리십시오. 믿음에 종류가 있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들어서 믿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만큼 되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믿음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가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것을 가짜로 드러내시고, 인간의 힘과 가능성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나 사라의 태가 죽은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세상적인 조건과 환경 형편 때문에 약해지거나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약해졌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사실 믿음은 언제나 불변입니다. 다만 우리들의 마음이 믿음에 복종되어지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더 복종되고 흔들리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거든 그것으로 기뻐하십시오. 신자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자입니다. '목사님,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는데요'라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없는 것을 목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믿음을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목사는 다만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릴 뿐입니다. 엉뚱한 것을 믿음이라고 붙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거든 할 일은 하나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도저히 나는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으니까 하늘의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마음조차도 죽은데서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잊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