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20-25 의

잠 11:20절에 보면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잠 12:22절에 보면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러한 구절들을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좋은 근거가 됩니다. 분명히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은 행위가 온전한 자를 기뻐하시고 진실히 행하는 자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만큼 결코 행함을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럴 때 '분명히 성경에 인간의 행위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는데 당신은 그럼 성경을 무시하느냐?'는 반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분명히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는 온전한 것이고 진실히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먼저 생각할 것은 인간에게서 온전하고 진실된 행위가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마음이 패려하고 거짓된 입술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마음이 패려하다거나 거짓된 입술은 모두가 인간이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웃이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게 되는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혹 여러분은 '나는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나는 마음이 패려하고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신다면 결국 잠언서의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기뻐하신다는 주장을 하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온전한 행함, 진실된 행함을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이 온전하고 진실된 행함입니까? 아니면 구제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것이 온전하고 진실된 행함입니까?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나를 생각하는 자들이고, 무엇을 행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나의 보람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인간에게서는 온전하고 진실된 행함이 나올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세상에서 온전하고 진실된 행함을 보이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은 철저히 부정한 채 오직 하나님에 매이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온전이고 진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은 100억을 잃어버리게 한 사람이 만원을 내어놓으면서 이것으로 100억 잃어버린 것을 다 잊고 기뻐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는 인간에 의해서 망가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이고 안식이었던 것을 인간이 깨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께 나와서 망가져 버린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비하면 먼지보다 못한 것을 내어놓으면서 '이것으로 기뻐하십시오'라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인간은 자꾸 인간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것을 망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갖다 바친다고 한들 그것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기쁨이었던 창조의 세계를 망친 장본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겠다고 들썩이는 것부터 이미 하나님의 심정에 전혀 가까이 하지 못한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한 일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입다물고 처분만 기다려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에덴동산은 아담이 망쳤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저나 여러분이 에덴에 있었다면 바로 저와 여러분에 의해서 에덴은 망가졌을 것입니다. 그 증거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를 망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든 관심은 세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심판 당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색하게 만들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가 에덴 동산에 있었던들 과연 믿음으로 살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인간을 극도로 비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자체가 하나님 앞에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자꾸 하나님 되어 살려고 하니 인간을 끌어내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기뻐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할 때입니다. 시 18:19절에 보면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만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고 구원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 18편의 말씀을 보면 다윗은 자기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는 말씀을 봐도 다윗은 자신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라는 말씀에서 말하는 의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 즉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의지하는 그 믿음을 의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은총으로 주신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하나님만 의지할 때 그것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 믿음이 의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22절에서도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께 의가 되었던 것은 그 믿음으로 거창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약속을 믿은 것이 의가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보지 않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분임을 알았기에 그분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옆에서 대신 행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뭘 해라는 말이냐?'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할 일은 선물로 주신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24절에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죽은데서 살리신 분입니다. 죽은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보탠 것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를 보태려고 하지 말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에게 행함이 없다고 해서 자신을 의심하고 낙심하는 불신앙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라고 하면 인간의 행위와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행위가 없이 의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에서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일을 찬양하는 다윗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을 봐도 의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그것을 의로 보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의지하고 감사했다고 의로 여기시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죽은데서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의해서 흘려진 것이 예수님의 피가 아닙니까? 피 때문에 구원받았으면 피를 의지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피에 보답하기 위해서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은 피의 가치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지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