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2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가 단절된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 제대로 인식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이 부른다고 해서 쪼르르 달려오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내가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결코 하나님을 자신에게로 다가오게 하는 수단이나, 또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 사람은 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말은 아는 것으로 다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자연히 주님에게만 모든 기대를 두고 살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말씀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전혀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행함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행함이 있으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행함을 포기하라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될 것이라는 그 생각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 행함을 밀어 넣으려고 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전혀 의가 될 수 없는 우리들의 행함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밀어 넣어서 그것을 근거 삼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혜택을 누려보려는 발상은 예수님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 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만 끼어 들 수 있기 때문에 신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만 고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절에서도 말하기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예수님만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예수님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의지하면서 의가 되는 행함을 실천하기에 모든 힘을 기울이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의가 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참 답답한 것이 뭐냐면, 도대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이 오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고, 그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살아가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성경 어디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의 행위가 나와있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행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신 이유는 인간으로서는 가능성이 없고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포기가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뒤에는 성령이 오심으로서 여전히 인간에 대해서 포기했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쪽은 전혀 돌아보지 않으신 채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자기들끼리 모든 일을 다 해나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인간이 끼여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는 것은 깨끗한 물에 흙을 끼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을 안다면 그리스도만 고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만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더불어 하나님으로 화평을 누리자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은 다 제하여 버리자는 것입니다.

화평이라는 것은 사이가 좋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원래 화평한 관계였습니다. 그 화평은 인간이 오직 말씀의 자리에 존재라고 있을 때 주어지는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므로 창조되어진 세상은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도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루하루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피조물이 말씀대로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니 보시기에 선함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이 말씀대로 위치해있는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에는 말씀 외에 그 어떤 다른 것도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조되기 전 세상은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였습니다. 무질서와 혼돈이라는 것은, 말씀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제멋대로 위치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말씀이 개입되어서 무질서와 혼돈을 질서로 바꾸었다면, 앞으로 세상은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무질서와 질서로 구분하게 됩니다. 즉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상태가 질서이고,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무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에덴동산에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선악과입니다. 인간이 말씀 아래 있는가 아니면 자기의 뜻대로 살아가는가는 선악과가 온전한가 온전하지 않는가로 증명됩니다. 그리고 선악과가 인간에 의해서 손상되었을 때 결국 세상은 무질서로 환원될 수밖에 없고, 말씀이 깨어진 무질서의 세계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어진 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이 깨어진 자체를 무질서의 세계로 본다면 하나님이 회복하시고자 하는 세계는 당연히 말씀이 회복된 세계입니다. 그 회복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서 창조 질서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인간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붕괴되어진 창조 질서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질서의 세계,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말씀의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안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기뻐하시기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도 자연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으로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님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 안에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위만 믿고 자신의 행위는 믿지도 않고 의미를 두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은석교회에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석교회에 돈이 필요하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돈이 있어봐야 그 돈으로 목사 먹여 살리고 교회 운영하는 것 밖에 더 있습니다. 은석교회에 교회 건물이 필요하다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전세로 있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게 있습니까? 아니면 비오는 날 비맞으며 예배를 드렸습니까 겨울에 추위에 떨면서 예배를 드렸습니까? 설사 건물이 없어서 천막을 치고 추위에 떨면서 예배를 들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생활 조금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나는 하나님과 친하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하고 봉사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신이 지금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멸망으로 집어넣는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과 가깝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무 의미 없는 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섬겨야 할 하나님의 아들 정도로 여길 뿐입니다.

우린 하나님과 원수된 자입니다. 그런데 원수에게 떨어져야 할 진노가 예수님에게 대신 떨어져서 우리가 진노를 피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장소는 그리스도안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산다는 것은 나를 보지 않고 나 대신 피흘리신 주님만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행위가 있다고 해도 그 행위를 보지 마시고 지금도 나 때문에 피흘리신 손으로 나를 붙들고 있는 주님께만 모든 시선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