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1-2 화평

tm스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갈등의 대부분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기대하는 유익이 주어지지 않을 때입니다. 또 설사 유익은 주지 않아도 현 상태만 그대로 유지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의 상태도 무너져 버릴 때, 결국 열심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못되더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에게서 신앙의 기쁨과 감사라는 것은 사라져 버리고 '계속 믿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라는 갈등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평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왜 나에게 예수님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면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엡 2: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진노의 자식입니다. 진노의 자식의 특징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진노의 자식이 우리들의 본질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이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간의 본질과 상관이 없어진 것으로 여긴다면 결국 세상에서의 보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진노의 자식에서 해방되었고, 지옥도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고, 천국에 대한 보증도 받아놓은 상태라면 결국 기대할 것은 세상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세상에서의 어떤 보상이나 기대보다는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하겠다는 약속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로서 마땅한 삶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라는 태도로 서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자녀다'라는 태도로 서게 되면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한 당연한 것으로 여겨버리게 됩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감사가 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고, 세례를 받을 때 필요한 것이지 믿고 난 뒤에는 별 필요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ale는 자로서 받을 혜택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는 우리의 본질에서부터 출발을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나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모든 것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노의 자식으로서 멸망 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담담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우리의 정체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당연하게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거지로 지내던 자가 지나가던 왕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왕자로 대우받게 되었다고 할 때, 처음에는 물론 고맙고 황송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자신이 거지였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오히려 괴로웠던 옛날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거지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할 때 현재 왕자로 대우받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왕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던 처음의 고맙고 황송한 감격도 느끼지 못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거지의 신분을 생각하고 옛날의 거지처럼 살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주어진 은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다만 거지였다는 본질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현재의 은혜에 대해서 항상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매어있다고 비판을 합니다. 과거에는 진노의 자식이 맞지만 그것은 예수 믿기 전의 일이고 지금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더 이상 과거의 신분에 매어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도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자녀로 살아가야지 계속해서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가면 안됩니다. 그러나 본질상 진노의 자식에서 시작하자는 것은,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심판 받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으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자녀됨의 기쁨을 알려면 자녀가 아니었던 내 신분,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노의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한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진노의 자식으로서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없고서는 예수님에 대한 것은 다만 지식과 생각으로 여러분의 머리 속을 떠돌다가 흩어지고 사라지고 마는 공허한 예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노의 자식'이라는 본질에 대해서 전혀 심각함이 없이 듣습니다. 그저 그런가보다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진노의 자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지옥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진노의 자식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전혀 무감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도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노의 자식이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다만 사이가 별로 안좋은 관계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예 서로 만날 수 없는 원수관계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진노의 자식이었다는 본질의 심각성을 알아야 자녀 됨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누구나 믿음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싶으나 기뻐지지 않고 감사하고 싶으나 감사의 느낌이 솟아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신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고민거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혹시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어서 혼자 낙심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기쁨과 감사는 갖고 싶다고 해서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는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고 감사할 수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으로 족하다는 마음이 희미한 것입니다.

우린 자꾸 그리스도로 족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으로 족하고자 원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문에 내 욕심에 차지 않은 생활로 인해서 신자로서 누려야 할 기쁨과 감사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는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화평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영원히 원수로 남아 있어야 할 관계였습니다. 그러한 관계가 예수님이 개입하심으로서 화평을 누리는 관계로 전환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들이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에 대해서 전혀 무감각한 것처럼, 인간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로 남아있어야 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니다는 것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는 진노의 자식도 아니고 원수된 관계도 아닌데 왜 자꾸 옛날 일을 끄집어내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화평의 관계란 예수님이 개입해 있을 때 가능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인간 독단적으로 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이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을 대신 받고 죽으시고 하늘로 가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해서 원수된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전환된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무슨 문제냐?'라고 반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할 일 다하셨고 나머지 문제는 우리에게 일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정성을 다 보인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오직 약속을 실현하는 제사뿐입니다. 그 제사는 하나님이 약속한 분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화목제물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분이 제물된 그것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2절에서도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 역시 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모두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다 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알고 있는 증거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증거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나는 오늘도 주님이 아니면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인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고후 5:18-19를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기보다는 내가 한일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에 나와서 무슨 거창한 일을 했다고 해도 '나의 나 된 것은 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잘하고 못하고에 전혀 상관없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확인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