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3-4 환난

힘에 대한 인간의 애착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합니다. 힘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고 힘이 있어야 기를 펼 수 있는 세상에서 힘이 없다는 것은 결국 '소망 없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힘이 지배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윤리와 도덕이 있어야 세상에 질서가 이루어진다고들 말하지만 그 윤리와 도덕도 결국에는 힘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윤리와 도덕은 모든 계층을 무너뜨리고 통용되는 윤리 도덕이 아니라 규정된 계층안에서만 통용되는 윤리 도덕인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자기보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예의를 갖추어서 대하는 것이 윤리이고 도덕입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돈 많은 부자가 나이가 많은 가난뱅이, 거지에게 예의를 가지고 대할 수 있습니까? 이미 '나이'라고 하는 윤리 도덕을 뛰어 넘어서 돈이라는 힘의 구조를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일단 나보다 약한 자라는 의식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보다 약하기 때문에 예의가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통용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이 어린 부자는 자신과 동등한 힘을 소유한 나이 많은 자를 만났을 때 비로소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며 예의를 갖추어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의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사회는 힘에 의한 질서가 통용되고 있는 것이지 절대로 윤리와 도덕에 의한 질서가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에서 나이 많고 늙은 분들이 왜 대우를 받지 못합니까? 그것은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경제적인 실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실권이 있는 자는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대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드신 분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자식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제자가 스승에게 함부로 하는 세태를 보면서 어른들은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졌느니, 예의범절이 사라졌느니 하면서 개탄들을 하지만 사실 예의 범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힘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도 조선시대 같은 옛날에는 철저한 가부장적인 제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해도 가정에서 힘이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잘못해서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 사회에서 살아가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도저히 불효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결국 환경이나 분위기 또는 당시의 제도가 부모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해도 어른은 대우를 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사회는 돈도 물론 필요했지만 양반과 상놈이라는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비록 돈이 없다고 해도 양반이라는 계급만 가지고 있으면 대우를 받았습니다. 글을 읽는 선비이고 양반이라면 아무리 누더기를 입고 다녀도 고귀하게 보였고 청렴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오히려 자랑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양반 상놈의 계급 사회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신분의 계급이 아닌 돈에 의한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신분이 힘이 아니라 돈이 곧 힘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세상이 되고 돈이 곧 힘이라는 논리가 통용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돈 없는 부모는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되고, 돈 없는 어른 역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스승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회는 글을 숭상했습니다. 글을 많이 읽은 선비가 존경을 받고 글을 많이 아는 지식자가 대우를 받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글을 가르치는 스승이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글이 대우를 받지 않습니다. 글이란 곧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즉 돈이라는 힘을 얻기 위해서 글, 지식을 이용할 뿐입니다. 따라서 지식을 전하는 스승은 단지 돈을 벌고 출세하게 해주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스승이 스승으로서의 대우를 받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힘에 대한 강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힘이 되는 쪽으로 이용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닌 것입니다. 종교 역시 자신에게 힘이 되는 쪽으로 이용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종교' 이것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의식이며, 사단이 종교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심어 놓은 환상입니다.

이러한 종교 의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종교와 종교의 대립만이 아니라 같은 종교인끼리도 서로 힘으로서 대립하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있었던 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 투표에 나타난 폭력 사태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고, 수많은 교회들에게서 나타나는 대립과 분란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교회와 교회의 힘의 대립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목사와 장로의 힘의 대립이 있습니다. 또 서로 다른 구역끼리 경쟁을 하고, 헌금을 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모든 것까지 힘의 구조 안에서 자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말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자기 힘모으기'로 나타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왜 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치는 이유도 교인들의 신앙을 염려해서라기 보다는 교회 부흥을 염려해서 하는 다그침이라는데에는 그 누구도 반박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하지 않음으로서 자연히 교회가 나약해지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를 위해서 하라고 외쳤던 것이지 교인들을 위해서 하라고 외쳤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동물들을 훈련시킬 때, 훈련 효과를 위해서 잘하면 먹을 것을 상으로 주는 것과 같이 교인들로 하여금 실천하도록 하는 효과를 위해서 복과 상이라는 것을 제공하는 것도 교인을 조련하는 조련사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제 말이 너무 거칠고 극단적이며 포용하려는 마음도 없이 보이기 때문에 싫어하시는 분도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말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 욕망에 둘러싸인 인간이 그 길을 차단해 버리고 멸망으로 끝날 길을 진리라고 내세우면서 자기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까지 지옥가게 하는 현실을 바라볼 때 거친 말을 지우고 싶은 의도가 전혀 일어나지 않음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힘에 대해서 길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종교를 자기 힘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어지는가를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모르는 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말이고 또 목사들이 많이 설교한 본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요즘 같이 IMF라고 해서 생활이 많이 힘들어진 분위기에서 더욱 많이 설교되어졌을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오해된 것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환난을 즐거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바라보면서 '그래 환난을 받아도 즐거워 해야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즐거움을 주는 환난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환난을 즐거워하자고 하거나 환난을 받아도 슬퍼하지 말고 믿음으로 즐거워 해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 말을 정신병자의 말이라고 단정하고 싶습니다. 자기 욕망에 정신이 팔린 사람이 환난 가운데 있는 신자의 입장이나 그 마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목사이기 때문에 위로해야 하고, 또 혹시 환난 때문에 낙심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자기에게 손해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교회에 나가지 않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환난이 왔을 때 기뻐하려고 애를 씁니다. 낙심이 되고 슬픔이 와도 낙심하지 않고 있고 슬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환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는 헌금을 한다거나, 속은 어찌되었든 겉으로는 웃고 예전보다 더 열심히 교회 봉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가? 왜 슬플 때 슬픔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낙심이 될 때 낙심하는 모습을 정직하게 보이지 못합니까? 특히 이것은 교회에서 소위 높은 직분에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연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약해서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낙심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반대로 '역시 평소에 기도하고 봉사하더니 환난이 와도 낙심하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 봐라. 참 믿음 좋다'는 칭찬을 듣고자 하는 노림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어떤 인간도 환난을 기뻐하거나 환난이 가져다 준 슬픔과 낙심을 물리치고 즐거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위 믿음 약한 모습보다는 믿음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욕심에서 슬픔과 낙심을 물리친 척 하는 가장과 위선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나약함보다는 강함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며, 종교적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에게서는 이러한 모습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강함, 즉 믿음 좋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가장되고 위선된 행동들을 하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생겨도 믿음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담담한 척 하고, 병이 들어도 오히려 기쁜척 하고, 돈에 손해를 봐도 '돈으로 천국가는 것 아닌데'하면서 괜찮은 척 하는 것들이 바로 믿음 좋음을 드러내기 위한 위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이 생겨도 예수님 때문에 담담한데, 담담한 척 하면 위선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서 일부러 담담하지 않은 척한다면 그것 역시 남의 눈을 의식하는 위선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라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위선이고 저렇게 해도 위선이 된다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라는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십시오. 화가 나면 화를 내시고 슬프다면 슬퍼하시고 울음이 나오면 우십시오.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마시고, 믿음도 의식하지 마시고, 아무 것도 의식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그것이 정직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것에 신경을 쓰면 결국 가식이 나오게 됩니다. 슬플 때 슬퍼하고 울음이 날 때 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마시고, 슬퍼하고 울면서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없으면 그냥 슬퍼하고 우는 것으로 그쳐버립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죽어 가는 자식을 낫게 해달라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이런 경우에 '믿음 좋은 모습은 자식이 병들어도 슬퍼하지 않고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속마음은 자식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병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면 '믿음이 없다' '성경을 모른다' '기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을 들을까봐서 일부러 자신의 기도를 숨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병들어 죽어가는데 병낫기를 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 알기를 구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것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붙들고 놓치 않으려는 것을 하나님이 먼저 치십니다. 그럴 때 순순히 그것을 내어 놓고 포기하는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키고 보호하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어 놓지 않으려고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신앙을 잘못 생각하게 되면 비록 포기하지는 싫지만 하나님이 치신 것이니까 겉으로나마 '하나님 가져가십시오'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기한척 하는 것이지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싸우라는 것은, 하나님이 치셨을 때 그것을 포기하기 싫은 마음 그대로 '지켜달라,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가져가셨을 때, '역시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고 원하는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랬을 때 결국 포기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싸우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병들었을 때 금식하면서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서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아이를 이 주일만에 죽게 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죽고 난 뒤의 다윗의 태도가 전혀 뜻밖입니다. 삼하 12:22,23을 보면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자식에게 애착을 가지고 살려달라고 기도했으면 죽은 뒤에는 더 슬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죽었는데 내가 금식한다고 다시 돌아오겠느냐?'라고 하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다윗이 진짜 아이를 사랑해서 기도했는가를 의심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셨던 "당신이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라"(삼하 12:14)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아이가 죽은 것은 내 죄 때문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살아난다면 다윗의 죄가 용서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었다는 것은 다윗의 기도나 금식도 죄를 용서받는데는 아무런 힘이 없고, 오직 내 죄 때문에 다른 자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이 시편 51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환난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냐?'를 생각하지 말라는입니다. 그렇게 되면 억지로 즐거운 척하고 기쁜 척하는 위선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환난을 당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는 내 소유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본연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고의로 감추려고 하지 말고 드러내고 하나님과 싸우십시오.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고, 철야하고 싶으면 철야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실 때,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진심으로 내가 내 소유를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게 되고 진정한 포기가 있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