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3-4 주를 보라

'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는 이 말이 기독교의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느낌은 참으로 공허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는 이 말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우리의 소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의미도 없고 필요치도 않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욕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것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지 결코 주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주로 말미암아 누리는 즐거움이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종교생활을 통한 자기 만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로는 '나는 주님으로 즐거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종교생활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을 주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기독교 서점을 갔을 때 '막쪄낸 찐빵'이라는 책의 저자인 이만재라는 사람이 쓴 '찐빵이 밥퍼 목사를 만나다'(이 제목이 맞는지 기억이 가물함, 어쨌든 맞거나 비슷한 제목임)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자신이 체험한 교회나 예수님에 대해서 일기 형식으로 책을 쓰게 된 사람입니다. 그 최초의 책이 '막쪄낸 찐빵'입니다. 그 뒤에도 찐빵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의 책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교회와 자신이 만난 목사를 통해서 종교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일명 밥퍼 목사라고 불리는 최일도 목사의 교회로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 역시 자신이 느끼고 체험한 것을 일기 형식으로 쓴 것이 '찐빵이 밥퍼 목사를 만나다'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어보면서 인간의 종교성과, 불신앙과, 선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인가를 마음 깊숙이 느꼈습니다. 이 사람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감동을 주고 관심을 두게 하는 대상이 아니라, 다만 착한 일을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감동거리였고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시작되고 그리스도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남으로 시작되고 인간으로 마쳐지는 삶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한 인간의 착함과 선을 보고 또 거기에 함께 동참함으로서 기독교의 재미를 마음껏 느끼고 스스로 감동을 받으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착각을 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이 사람에게 있어서 신앙의 즐거움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가난한 자에게 밥을 해주는 목사를 만난 것이나, 그러한 일에 자기도 동참을 한 것등의 모든 것을 다 제해버린다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과연 감동을 하고 믿음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라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오늘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누리자'는 말에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이 없이도 주님 한분만으로 즐거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소멸된다고 해도 여전히 살아 계시는 주님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진정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찬송을 함으로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은, 찬송의 즐거움을 주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함으로서 만족을 누리는 사람은 기도의 만족과 즐거움을 주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모든 것까지도 같은 차원에서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과연 여러분 자신이 찬송도 없고 기도도 없고 봉사, 구제, 선교도 없는 그런 가운데서도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 감사하고 감동하고 만족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만'의 차원이 아니라 '주님 + 행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따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하나하나 제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없을 때 뭔가 허전하고 교회 다니는 재미가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바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면 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3절의 말씀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말씀은 환난을 즐거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환난은 즐거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환난이 있을 때 그것을 기뻐한 척 하고 감사한 척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모두 자기의 믿음을 내세우기 위한 자존심 싸움이며 위선이고 억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환난에서 슬퍼하고 우는 것이 자연스런 인간의 모습입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것은 주님만으로 즐거워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환난도 이 즐거움을 어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말씀 역시 많은 목사들은 스스로 자기믿음을 키워 가라는 의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환난이 있으면 낙심하고 말고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인내는 연단을 낳게 되고 연단은 소망을 낳게 되니까 결국 환난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소망가운데 살게 하려고 주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하나 던져 주시면 그 환난을 받아서 우리 스스로 소망을 가지는 차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환난 속에서 스스로 인내하고 연단을 배우고 소망을 이루는 차원으로 나아가지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결국 이러한 가르침에서 교인들이 가지는 심적 부담은 환난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갈수록 낙심되고 인내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기 믿음에 대한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즐거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믿음의 수준을 높이고 그 높은 수준을 앞세워서 만인 앞에 당당하게 서고 하나님 앞에도 당당하게 나서려는 착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못해서 부끄럽다, 성경을 못봐서 부끄럽다, 이런 모든 것이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준을 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즐거워하려고 하게 되고 환난을 이기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있을 때 낙심이 되고 염려와 근심에 빠진다고 해서 '나는 믿음이 없는 자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마음껏 낙심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 스스로 낙심하지 않으려고 하고 근심하지 않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역시 세상에서 환난을 겪으신 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내하셨습니다. 연단을 받으셨고 오직 하늘에만 모든 소망을 두신 분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즐거워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말씀으로 살아갈 때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 15: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는 결국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환난이 어떤 형태로 여러분에게 다가온다고 해도,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이 여러분의 주위에서 발생한다고 해도, 주님만 바라보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를 보고, 주님의 인내를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주님의 인내가 여러분의 인내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주님의 연단이 여러분의 연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소망 안에서 여러분도 주님과 같은 소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난 중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신자의 삶입니다.

항상 여러분의 시선과 관심을 주님께 두려고 하십시오. 자기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교회도 바라보지 마십시오. 소망은 여러분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고,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입니다. 여러분이 아무 것도 안해도 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저주의 운명에 희생과 사랑으로 개입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이 신자입니다.